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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초대교회, 세상을 이기다!* 본문 : 사도행전 5:33-42*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1. 3.
 

이창모 2024-11-03 15:58:46 88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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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다시 핍박이 시작되다* 본문 : 사도행전 5:17-32*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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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본문 : 사도행전 5:12-16*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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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사람만 보면 하나님은 안 보인다 * 본문 : 사도행전 5:1-11*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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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약점 * 본문 : 사도행전 4:32-37*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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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위기의 때, 기도할 때 * 본문 : 사도행전 4:23-31*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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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가 판단하라 * 본문 : 사도행전 4:13-22*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9. 22.
 

이창모 2024-09-22 16:06:55 543 더보기
신학세미나
신학세미나

인자가 가까이....이른 줄 알라”(막13:29)는 심각한 오역이다.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31)
글을 시작하며
신약성경의 번역자들은 헬라어 원문에서 지시 대명사나 인칭 대명사를 번역할 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12:16).
위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로 번역된 헬라어 “λέγει”(레게이)는 “말하다(say)”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λέγω”(레고)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그가 말씀하신다.”인데, ‘개역개정’에서는 ‘3인칭 대명사’ “그가”를 “예수께서”로 의역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영어 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인칭대명사나 지시대명사는 의역하지 않고, 그대로 직역한다).
물론 인칭 대명사나 지시 대명사를 바르게 의역하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 그러나 잘못 의역하면 오히려 독자들의 이해를 그르쳐 버린다. 그러므로 인칭대명사나 지시대명사를 엉터리로 의역할 바엔 차라리 영어 성경에서처럼 원문대로 대명사를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본 글에서 다루려는 개역개정 막13: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에서 “인자가”는 ‘대명사’를 엉터리로 의역한 대표적인 심각 사례일 것이다.
막13:29의 헬라어 원문에는 “인자”, 즉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푸)라는 어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럼에도 ‘개역개정’은 막13:29의 ‘현재 3인칭 단수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되어 있는 주어를 친절하게도 “인자”로 의역함으로써, 마가복음 1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전체의 의미를 오리무중 안개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역이 발생했을까?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막13:5부터 막13:33까지에서 제자들이 질문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함께 종말의 징조 까지 번갈아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들이 이를 놓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막13:29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들은 종말에 관한 말씀으로 보았기 때문에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를 “인자”로 잘못 의역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막13장을 읽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함께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도 번갈아가며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대해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번갈아 가며 말씀하신 까닭은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예루살렘 멸망의 때가 곧 종말의 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함께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중복해서 연속적으로 말씀하신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서 종말의 징조로, 또 종말의 징조에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로 주제가 바뀔 때 언급되는 ‘역접 접속사’ “δὲ”(데/but)로 알 수 있다(물론 이런 용도 말고도 막13장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된 “그러나”가 더 있다). 즉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에서 종말로, 종말에서 예루살렘 멸망으로 주제를 바꾸실 때마다 “δὲ”(데/but)로 말씀을 시작하심으로써, 듣는 자들이 주제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막13:5-23은 제자들이 질문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가 곧 종말의 징조라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24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하시면서, 27절까지에서 종말의 징조는 이러하며, 그때 인자가 재림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예수님은 28절에서 “그러나”로 다시 예루살렘 멸망의 주제로 돌아가시면서, 31절까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예루살렘 멸망의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32절에서 “그러나”로 다시 종말의 때에 관해 교훈하시면서, 37절까지에서 종말의 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주의하며 깨어있도록 경계하셨다.
여기서 참고로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는 예민하게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가 있을 때는 그곳을 피해 도망하기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막13: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그러나 종말의 때의 징조는 예민하게 감지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종말의 징조는 그 징조와 함께 예수님이 바로 재림하시기 때문에, 종말의 징조를 보고 종말을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막13:24-26/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이렇게 종말의 징조는 설령 사람들이 감지했다할지라도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할 시간이 없으므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김없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막13: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를 감지하면 대비하고 피해야 하지만, 종말의 때는 이런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막13: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항상 깨어서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재림의 때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번갈아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번역자들이 놓치므로, 막13:29-31이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의 단락 막13:24-27의 종말 이야기의 연속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므로 29절도 막13:24-27의 종말 이야기의 연속이라고 여겼으므로, 번역자들은 앞 단락 26절(그 때에 인자가/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푸/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의 “인자”와 연계해서, 29절에서도 마지막 날에 문 앞에 있을 그 무엇도 당연히 “인자”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를 “인자”로 의역한 것은 종말의 때를 말하고 있는 26절과 연계해서 볼 때에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막13:24-27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인 반면에,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포함된 막13:28-31은 종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심각한 오역일 수밖에 없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오역 때문에 30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의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종말의 때를 착각한 단순한 허풍쟁이 인간으로 예수님을 치부해 버렸고, 정통 보수 신학자들은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와 모순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30절을 터무니없는 억지 해석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막13:29의 원문 “οὕτως καὶ ὑμεῖς, ὅταν ἴδητε ταῦτα γινόμενα, γινώσκετε ὅτι ἐγγύς ἐστιν ἐπὶ θύραις”(후토스 카이 휘메이스 호탄 이데테 타우타 기노메나 기노스케테 호티 엥귀스 에스틴 에피 뒤라이스)의 바른 번역은 무엇일까?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의 바른 번역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13:29)
위에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γινώσκετε ὅτι ἐγγύς ἐστιν ἐπὶ θύραις”(기노스케테 호티 엥귀스 에스틴 에피 뒤라이스)인데,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는 “인자”(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라는 어구는 찾아볼 수 없다.
본문에서 “가까이 ~ 이른”으로 번역된 “ἐγγύς ἐστιν”(엥구스 에스틴)에서 “ἐγγύς”(엥구스/가까이)는 ‘성’(性)이 없는 ‘부사’이다. 이는 “ἐγγύς”(엥구스) 만으로는 뒤에 있는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의 성(性)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른”으로 번역된 동사 “ἐστιν”(에스틴)은 “~이다, ~이 되다”(be, become)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εἰμί”(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로서,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되어 있는 주어는 “그(he)”, “그녀(she)” 또는 “그것(it)” 중에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되어 있는 주어의 성(性)이 무엇인지는 전후문맥에 맞게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른(있는)”(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는 “그(he)” “그녀(she)”, “그것(it)” 중에서 어느 것이 맞을까?
다시 말하지만, 막13:29의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인 앞 단락 막13:24-27과 같은 주제의 연속이라면, 앞 단락에 “그 때에 인자가/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푸/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26절)가 있으므로, 29절의 ‘3인칭 단수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는 당연히 “그(he)”이며, 이를 의역하면 “인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막13:24-27은 종말에 관한 말씀인 반면에,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포함된 막13:28-31은 종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이므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오역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여기서 “문(들) 앞에”(ἐπὶ θύραις/에피 뒤라이스)는 무엇인가가 곧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관용어이며, 또 “이른”은 원문대로 “있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아무튼 “δὲ”(데/그러나)로 시작하는 28-31절까지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이므로, 이 단락은 막13:24-27이 아니라 막13:5-23의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인 ‘3인칭 단수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막13:5-23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이를 염두에 두고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인 ‘3인칭 단수 대명사’가 정말 “인자”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비유(막13: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에서 여름이 문 앞에 있다는 결정적인 징조는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막13:5-23에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들 중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14절)이 예루살렘 멸망이 문 앞에 있다는 징조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이 코앞에 있다는 이 징조를 보거든 지체 없이 도망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따라서 막13:29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막13:14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28절)에 해당하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29절)은 성전 멸망이 문 앞에 있다는 결정적인 징조인 14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14절)을 가리킨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것이 여름이 곧 온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곧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막11장에서 예수님의 저주로 인해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사건에서 무화과나무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상징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28절 이하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비유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께 질문한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13:4)에서 “이런 일”(ταῦτα/타우타)이 예수님의 말씀인 29절(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의 “이런 일”(ταῦτα/타우타)과 동일하다는 데서도 앞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29절에서 “이런 일”로 번역된 “ταῦτα”(타우타)가 4절에서 제자들이 질문한 성전이 멸망의 징조(이런 일/ταῦτα/타우타)에 대응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또 29절의 “너희가~ 보거든”(ὅταν ἴδητε/호탄 이데테)과 14절의 “(너희가) 보거든”(Οταν [δὲ] ἴδητε/호탄 [데] 이데테)이 같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 한다. 그렇다면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인 ‘대명사’는 “그(he)”, “그녀(she)”, “그것(it)” 중에 ‘중성 지시대명사’ “그것(it)”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이 코앞에 있다는 징조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므로,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키는 ‘중성 지시대명사’ “그것(it)”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 “그것(it)”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징조로 하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 번역 성경들에서는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을 모두 다 “인자가 이르다”의 의미로 오역했으며, 영어 성경에서는 둘로 갈린다. ESV, NASB, NJB, RSV 등에서는 “He is near”로 오역했고, KJV, NIV, TNIV, WEB 등에서는 “it is near”로 원문대로 제대로 직역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번역 성경에서 “ἐστιν”(에스틴)을 “인자가 이르다(있다)”로 오역했기 때문에, 30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을 해석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30절을 근거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단순한 인간으로 치부해 버렸다. 인간 예수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종말이 온다고 큰 소리쳤지만, 잘못 짚은 허풍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통 보수 신학자들은 막13:30의 “이 세대”는 재림 전의 모든 세대를 가리킨다고 억지를 쓴다.
그러나 “이 세대”로 번역된 “ἡ γενεὰ αὕτη”(헤 게네아 하우테)는 당시의 그 세대, 즉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보통 성경에서 말하는 한 세대는 약 45년이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심판의 예언과 예루살렘 멸망 사이의 간격이 약 45년 정도가 된다.). 그러면 막13:30을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아니라, 그것(it), 즉 “예루살렘 멸망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의 문맥 속에서 살펴보자.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로 번역된 “οὐ μὴ παρέλθῃ ἡ γενεὰ αὕτη μέχρις οὗ ταῦτα πάντα γένηται”(우 메 파렐데 헤 게네아 하우테 메크리스 후 타우타 판타 게네타이)에서 “οὐ μὴ”(우 메/never)는 부정의 강조를 나타내며, “전에”에 해당하는 “μέχρις”(메크리스)는 “~할 때까지, ~까지” 등의 의미를 가진 ‘접속사’로서, ‘종속 구문’ “οὗ ταῦτα πάντα γένηται”(후 타우타 판타 게네타이/직역: 이 일이 다 일어나기까지)를 ‘독립 구문’에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 문장의 강조점은 ‘독립 구문’인 “οὐ μὴ παρέλθῃ ἡ γενεὰ αὕτη”(우 메 파렐데 헤 게네아 하우테/직역: 이 세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에 있다.
따라서 “οὐ μὴ παρέλθῃ ἡ γενεὰ αὕτη μέχρις οὗ ταῦτα πάντα γένηται”(우 메 파렐데 헤 게네아 하우테 메크리스 후 타우타 판타 게네타이)를 직역하면,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때까지는(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NIV: this generation will certainly not pass away until all these things have happened.)가 될 것이다. 이는 이 세대, 즉 예수님 당시의 세대가 반드시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나타낸다.
글을 마치며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번역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인간의 번역에 오역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특히 기독교를 결정짓는 중요한 교리를 왜곡시킬 수 있는 오역은 반드시 피해야 하며, 만약에 이런 오역이 있다면, 빨리 찾아서 지적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본론에서 다룬 막13:29에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오역인줄 모른다면, 이 말씀에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즉 종말의 때를 알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성립되므로 종말의 때를 안다고 하는 자들이 등장해서 막13:29을 들이대면, 지극히 성경적이므로 할 말이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도 강조하신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13:32-33)는 말씀은 괜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대강 적당하게 살다가도,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그때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인자를 맞이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은 특히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13:35)
출처 :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교회 사진첩

22년 성탄 축하 공연 모습

관리자S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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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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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Ⅱ《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Ⅱ》
하나님론 -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사역하나님의 존재방식인 삼위일체 교리와 하나님의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 책이다. 근세신학은 삼위일체 교리를 완전히 제거하였으면, 로마교회와 종교개역교회는 대부분 배도를 완료했다. 서철원 교수는 교회가 구원종교로 남아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이루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교의신학 시리즈는 복음선포를 위한 설교 준비 교과서로 작성되었다. 또한 평신도들도 교의신학을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여 성경전체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전개하였다. 또 신학적인 난제들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 계시에서 유래한다.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신 것은 실체가 하나이고 동일하고 분할불가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사역의 방식은 아버지는 아들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일하신다. 삼위일체의 신비인 출생과 출래의 비밀을 성경대로 푼다. - 책에서 -
목차머리말제1장 서 론1.1. 정의
1.2. 하나님의 존재
1.2.1.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무한한 영이시다
1.2.2.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1.2.3. 하나님은 구속주이시다
1.2.4.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1.3. 하나님의 속성
1.4. 삼위일체 하나님1.5. 창조경륜
1.6. 만물 창조
1.6.1. 순간 완결된 창조
1.6.2. 전능한 창조주
1.6.3. 창조의 목표
1.6.4. 창조의 부정
1.7. 섭리
제2장 하나님의 존재제1절 하나님의 존재2.1.1. 스스로 계시는 무한한 영
2.1.2. 창조주 하나님2.1.3. 구속주 하나님2.1.4. 삼위일체 하나님제2절 하나님의 존재 증명 불필요2.2.1.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존재자이시다2.2.2.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
2.2.3. 하나님은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셨다
제3장 하나님의 속성제1절 전유적 속성3.1.1. 자존성3.1.2. 단순성과 유일성3.1.3. 무한성
3.1.4. 불변성제2절 유비적 속성3.2.1. 하나님의 생명
3.2.2.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
3.2.2.1. 하나님의 미리 아심3.2.2.2. 하나님의 지혜
3.2.3. 하나님의 의지
3.2.4. 하나님의 사랑
3.2.5. 하나님의 은혜
3.2.5.1.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3.2.5.2.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3.2.5.3. 하나님의 인자하심
3.2.6. 하나님의 의
3.2.7. 하나님의 주권
3.2.7.1. 절대적 권세
3.2.7.2. 섭리적 권세
3.2.8. 하나님의 거룩
제4장 삼위일체 하나님제1절 삼위일체 교리제2절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왔음제3절 삼위일체는 유일한 실체가 세 위격으로 계심임제4절 위격들의 관계와 구별
4.4.1. 관계에 의한 위격들의 구별
4.4.2. 교부들의 이해
4.4.2.1. 사도적 교부인 이그나치오스
4.4.2.2. 변증가 유스티노스
4.4.2.3. 안디옥의 떼오필로스
4.4.2.4. 에레나이오스
4.4.2.5. 텔툴리아누스4.4.2.6.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4.4.2.7. 오리게네스
4.4.2.8. 아다나시오스
4.4.2.9. 바실레오스
4.4.2.10.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4.4.2.11. 닛사의 그레고리오스제5절 삼위일체의 사역의 방식
4.5.1. 아다나시오스의 가르침
4.5.2. 힙폴리토스의 견해
4.5.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제시
4.5.4. 오리게네스의 강조제6절 각 위격의 사역의 방식
4.6.1. 아버지는 유래 없이 스스로 일하심
4.6.2.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일하심
4.6.3.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일하심
4.6.3.1. 에레나이오스
4.6.3.2. 바실레오스
4.6.3.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4.6.3.4. 암브로시우스
4.6.3.5. 루피누스제7절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심의 방식
4.7.1. 하나님은 스스로 계심
4.7.2. 아들의 출생
4.7.2.1. 출생: 아버지에게서 아들의 위격이 나오심
4.7.2.2. 교부들의 이해
4.7.2.2.1. 유스티노스
4.7.2.2.2. 타치아노스
4.7.2.2.3. 아떼나고라스
4.7.2.2.4. 에레나이오스
4.7.2.2.5. 텔툴리아누스
4.7.2.2.6. 힙폴리토스
4.7.2.2.7. 노바치안
4.7.2.2.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4.7.2.2.9. 오리게네스
4.7.2.2.10.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4.7.2.2.11. 아다나시오스
4.7.2.2.12. 힐라리우스
4.7.2.2.13. 바실레오스
4.7.2.2.14.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4.7.2.2.15. 닛사의 그레고리오스제8절 출생의 성경적 해명
4.8.1. 정의: 아들의 출생=하나님의 자기 객관화 자기 객관화가한 인격을 이룸제9절 성령의 출래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
4.9.1. 출래: 성령의 위격적 존재방식
4.9.2. 교부들의 이해4.9.2.1. 텔툴리아누스
4.9.2.2. 오리게네스
4.9.2.3. 아다나시오스
4.9.2.4. 힐라리우스
4.9.2.5. 바실레오스
4.9.2.6.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4.9.2.7.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4.9.2.8.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4.9.2.9. 암브로시우스
4.9.2.10. 루피누스
4.9.2.11. 아우구스티누스
4.9.2.12. 아다나시오스 신경
4.9.2.13. 다메섹의 요한네스
4.9.3. 성령의 출래: 하나님의 호흡의 방식
4.9.4. 단일 출래를 교리로, 그러나 이중 출래도 주장제10절 출래의 합당한 해명: 출래=무한한 신성의 현시
4.10.1. 정의: 성령의 출래: 하나님의 충만의 현시 무한한 신성의 현시가 한 인격을 이룸
4.10.2. 무한한 충만은 편재하심임제11절 보혜사 성령
4.11.1. 성령=보혜사
4.11.2. 보혜사 성령의 직임
4.11.3. 보혜사 성령은 믿는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심
4.11.4. 보혜사는 사람들 안에 믿음을 일으키심
4.11.5. 보혜사 성령의 내주
4.11.6. 보혜사는 구원진리를 가르치심
4.11.7. 보혜사는 믿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지키심
4.11.8. 보혜사는 거룩하게 하심제12절 원보혜사와 다른 보혜사
4.12.1. 원보혜사가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 지목
4.12.2. 그리스도는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을 청구
4.12.3.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
4.12.4. 보혜사 성령의 본질제13절 위격의 문제
4.13.1. 실체와 위격의 관계
4.13.2. 페리코레시스
4.13.3. 분리 불가한 교제
4.13.4. 신격과 위격들이 분열되지 않음제14절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현대적 이해
제5장 삼위 하나님의 사역제1절 창조
5.1.1. 창조주 아버지: 창조 작정
5.1.1.1. 사도신경과 신앙의 규범의 가르침
5.1.1.2. 로마의 클레멘트
5.1.1.3. 이그나치오스
5.1.1.4. 헤르마스
5.1.1.5. 유스티노스
5.1.1.6. 타치아노스
5.1.1.7. 안디옥의 떼오필로스
5.1.1.8. 아떼나고라스
5.1.1.9. 에레나이오스
5.1.1.10. 텔툴리아누스
5.1.1.11. 힙폴리토스
5.1.1.12. 노바치안
5.1.1.1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1.1.14. 오리게네스
5.1.1.15. 아다나시오스
5.1.1.16.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5.1.1.17. 아우구스티누스
5.1.2. 아들 하나님: 직접적 창조주
5.1.2.1. 이그나치오스
5.1.2.2. 유스티노스
5.1.2.3. 타치아노스
5.1.2.4. 떼오필로스
5.1.2.5. 아떼나고라스
5.1.2.6. 에레나이오스
5.1.2.7. 텔툴리아누스
5.1.2.8. 힙폴리토스
5.1.2.9. 노바치안
5.1.2.1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1.2.11. 오리게네스
5.1.2.12. 아다나시오스5.1.2.1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5.1.2.14. 아우구스티누스5.1.3. 성령 하나님: 창조의 완성5.1.3.1. 아떼나고라스5.1.3.2. 에레나이오스5.1.3.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1.3.4. 아다나시오스5.1.3.5. 바실레오스5.1.3.6. 닛사의 그레고리오스5.1.3.7. 암브로시우스
5.1.3.8. 루피누스제2절 구속과 구속주
5.2.1. 하나님 아버지: 구원 작정으로 구주로 고백됨
5.2.2. 아들 하나님: 구속사역 수행으로 실제 구속주이심
5.2.3. 교부들의 증거
5.2.3.1. 로마의 클레멘트
5.2.3.2. 제 2 클레멘트
5.2.3.3. 바나바스
5.2.3.4. 이그나치오스5.2.3.5. 유스티노스
5.2.3.6. 에레나이오스
5.2.3.7. 힙폴리토스
5.2.3.8. 오리게네스
5.2.3.9.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5.2.3.10. 메또디오스
5.2.3.11. 니카야 신경5.2.3.12. 아다나시오스
5.2.3.1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5.2.3.14. 닛사의 그레고리오스5.2.3.15. 칼케돈 신경5.2.4. 성령 하나님: 그리스도의 구원적용으로 구원완성
5.2.5. 교부들의 이해5.2.5.1. 이그나치오스
5.2.5.2. 에레나이오스
5.2.5.3. 노바치안
5.2.5.4.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2.5.5. 오리게네스
5.2.5.6. 아다나시오스
5.2.5.7. 예루살렘의 퀴릴로스
5.2.5.8. 바실레오스
5.2.5.9. 빅토리누스제6장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근세신학제1절 슐라이어마허6.1.1. 칸트의 인식론 도식으로 신학을 완전히 바꿈6.1.2. 신=순전한 의존감정을 발음하는 것6.1.3. 삼위일체 교리의 새로운 논의6.1.3.1. 삼위일체는 전적 의존감정이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있는 것
6.1.3.2. 슐라이어마허는 의존감정을 영원화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
6.1.3.3. 슐라이어마허의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 비판
6.1.3.4. 삼위일체 교리는 이방 다신교가 그리스도교에 들어와서 형성된 것이라고 함
6.1.3.5. 삼위일체 교리를 변형해야 한다고 함6.1.4. 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가?6.1.5. 성령=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통정신제2절 칼 발트
6.2.1. 하나님은 유일한 신적 존재
6.2.2. 세 위격은 세 존재방식6.2.3. 삼위일체=계시의 세 계기로서 하나님의 존재방식6.2.4. 하나님의 존재: 행동과 사건
6.2.5. 하나님의 존재: 행동과 사역들 안에
6.2.6. 하나님의 존재: 계시의 행동6.2.7. 하나님의 신성: 행동하는 사건6.2.8. 하나님의 존재=생명, 자유로운 행동, 자유로운 사건6.2.9. 하나님의 존재=자기의 결정
6.2.10. 행동과 결정 위에 신의 본질 내로 소급할 계기 없음6.2.11. 교제를 마련하심=그의 행동, 신의 본질임
6.2.12. 하나님만이 인격: 인간 예수만이 인격6.2.13. 유일한 인격적 하나님
6.2.14. 하나님의 존재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 안6.2.15.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6.2.16. 예수 그리스도=유일한 하나님
6.2.17. 선포: 예수 그리스도만=현존하시는 하나님
6.2.18.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철저히 회개한 죄인
6.2.19. 결론: 인간 예수 그리스도=유일한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이 없음제3절 폴 틸리히6.3.1. 신은 존재자체6.3.2. 신은 사람의 궁극적 관심사를 표현하는 것6.3.3. 신은 존재자체이고 존재의 기반이다
6.3.4. 존재자체가 삼위일체적 원리이다6.3.5. 틸리히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논의로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고 존재자체를 신으로 만들었다제4절 칼 라아너
6.4.1. 하이데거의 철학으로 신학을 완전 변화시킴
6.4.2. 신=존재자체, 거룩한 신비
6.4.3. 삼위일체=존재의 통보 도식제5절 위르겐 몰트만
6.5.1. 삼위일체: 십자가상의 고통의 사건
6.5.2. 삼위일체론의 근거는 신론을 그리스도인의 자기의식으로 바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함
6.5.3. 삼위일체를 십자가상의 고통의 교류의 사건으로 전개
6.5.4. 사건 안에서 기도함
6.5.5. 사랑의 사건
6.5.6. 삼위일체: 하늘의 원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온 종말론적 사건
제7장 하나님의 창조경륜제1절 경륜과 작정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
7.1.1. 작정에 대한 전통적인 세 구분
7.1.2. 일반적 작정과 특별 작정제2절 경륜과 작정에 대한 바른 성찰
7.2.1. 작정=하실 일을 미리 정하심제3절 작정과 경륜에 대한 성경적 근거
7.3.1. 하나님의 뜻을 작정으로 표현한 성경본문들
7.3.2. 경륜을 직접 표현한 성경본문
7.3.3. 예정으로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4. 작정을 직접 표현한 성경본문
7.3.5. 경영과 도모, 모략으로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6. 택하심으로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7. 인봉, 인봉한 책, 책으로 하나님의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8.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제4절 창조경륜
7.4.1. 창조경륜 정의
7.4.2. 창조경륜을 집행하심: 선악과계명으로 언약을 맺으심
7.4.3. 반역이 일어남
7.4.4. 반역한 백성을 구원하기로 정하심
7.4.5. 창조경륜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
7.4.5.1. 창조경륜의 확실한 성취
7.4.5.2.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백성으로 삼으심은 창조경륜의 성취를 위한 준비
7.4.5.3. 시내산 언약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심은 창조경륜의 성취를 위한 준비임
7.4.5.4. 새 언약의 목표가 창조경륜의 성취를 위한 것임을 밝힘임
7.4.5.5.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들을 구속함은 창조경륜의 성취임제5절 하나님의 작정들
7.5.1. 창조 작정
7.5.1.1. 물리적 세계를 언약백성의 거소로 창조하기로 하심
7.5.1.2. 영적 세계를 창조하시어 하나님과 언약백성을 섬기도록 하심
7.5.1.3. 백성으로 창조를 탐구하여 영원히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도록 작정하심
7.5.1.4. 영원세계에서도 창조탐구
7.5.2. 역사진행 작정7.5.3. 구원 작정
7.5.3.1. 하나님이 대신 죗값을 갚으심이 예정됨
7.5.4. 선택과 유기의 작정
7.5.4.1. 죄 때문에 창조경륜을 이루심에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세우심
7.5.4.2.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이 이루어짐
7.5.4.3. 예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작정임
7.5.4.4. 예정은 삼위의 사역
7.5.4.5.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확고하고 불변
7.5.4.6. 택자들의 수
7.5.4.7. 유기 작정제6절 선택 교리의 논의
7.6.1.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7.6.1.1. 작정의 불변성
7.6.1.2. 사람의 범죄는 신적 허락에 의해서
7.6.1.3.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 없이 되지 않음
7.6.1.4. 모든 인류의 구원은 예정된 자들만 구원되는 것을 뜻함
7.6.1.5. 하나님은 허락으로 이루시거나 실제로 자신이 이루심
7.6.1.6.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을 다 이루심
7.6.1.7. 예정은 은혜로 이루어짐
7.6.1.8. 지성적 존재의 타락을 예지하셔도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빼앗지 않으심
7.6.1.9.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룸
7.6.2.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개
7.6.2.1. 예정은 지성적 존재들을 영생으로 배정하는 것
7.6.2.2. 예정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집행함임
7.6.2.3.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음
7.6.2.4. 예정: 영생으로 배정 유기: 영생에서 탈락 허용
7.6.2.5. 예정: 영광의 원인 유기: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음임
7.6.2.6. 유기는 자유의지 박탈 아님
7.6.2.7. 조건 없는 선택
7.6.2.8. 예정은 공로와 상관없음
7.6.2.9. 예정은 확실함
7.6.2.10. 예정된 자들의 수: 확정적
7.6.3. 칼빈의 가르침
7.6.3.1. 자유의지로 공로 이룰 수 없음
7.6.3.2. 죄로 자유 박탈됨: 의 추구 못함
7.6.3.2.1. 자유의지 주창자: 이성의 지도를 받아 의지가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
7.6.3.2.2. 교부들도 의지의 자유 인정, 선행 가능성 주장
7.6.3.3. 초자연적 은사들 제거: 자연적 은사들 부패
7.6.3.4. 선의지와 선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7.6.3.5. 믿음과 선행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7.6.3.6. 본래의 자유의지는 남아 있지 않음
7.6.4. 칼빈의 선택 교리
7.6.4.1. 예정: 구원과 멸망으로 작정임
7.6.4.2. 예정 교리: 성경적 진리
7.6.4.3. 예정 교리 부정 불가
7.6.4.4. 민족적 선택과 개인의 선택의 차이
7.6.4.5. 선택과 공로 예지는 무관함
7.6.4.6. 문제점: 죄와 무관하게 예정 교리 전개
7.6.5. 종교개혁 신경들의 예정 교리 수납
7.6.5.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5.2. 영국교회의 39개조
7.6.5.3.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7.6.5.4. 제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7.6.5.5. 프랑스 신앙고백서7.6.5.6.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7.6.5.7. 돌트 신경
7.6.5.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7절 하나님의 합리적, 인격적 존재들을 다루시는 방식을 예정으로 오해함
제8장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심제1절 단번에 완결된 창조
8.1.1. 순간 완결된 창조
8.1.2. 플라톤의 창조론: 영원한 물질에서 현상으로 조성
8.1.3.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단계 창조론
8.1.4. 단번의 완성된 창조제2절 전능한 창조주
8.2.1. 창조를 작정하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8.2.2. 창조계획을 구현하신 창조주: 아들 하나님
8.2.3. 아들 하나님의 창조 중보직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
8.2.3.1. 바나바스
8.2.3.2. 이그나치오스
8.2.3.3. 유스티노스
8.2.3.4. 타치아노스
8.2.3.5. 안디옥의 떼오필로스
8.2.3.6. 아떼나고라스
8.2.3.7. 에레나이오스
8.2.3.8. 힙폴리토스
8.2.3.9. 노바치안
8.2.3.1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8.2.3.11. 오리게네스
8.2.3.12.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8.2.3.13. 아다나시오스
8.2.3.14. 예루살렘의 퀴릴로스
8.2.3.15. 암브로시우스
8.2.3.16. 루피누스
8.2.3.17. 아우구스티누스
8.2.4. 창조를 장식하고 완성한 창조주: 성령 하나님
8.2.5. 창조 진행을 마감하시는 창조주: 창조 중보자제3절 창조의 방식
8.3.1. 하나님은 그의 의지의 역사로 창조를 이루심
8.3.2. 하나님은 무에서 만물을 말씀으로만 불러내심
8.3.3. 하나님은 단번에 완결된 사물들을 만드심
8.3.4. 창조의 목표: 창조경륜…
8.3.4.1. 하나님은 그의 손의 일을 누리기를 기뻐하심
8.3.4.2. 창조주를 찬송하는 백성으로 사람을 창조하심
8.3.4.3. 언약백성으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하려고 광대무변한 우주를 창조하심제4절 하늘을 창조하심
8.4.1. 하늘을 창조 첫 순간에 다 창조하심
8.4.2. 영원물질에서 만물이 이루어졌다는 가설
8.4.3. 유출에 의한 창조는 불가함
8.4.4. 넓이와 길이의 문제
8.4.5. 하늘의 별자리들을 은하계를 중심으로 배치하심
8.4.6. 우리의 은하계에 태양계를, 그 중심에 지구를 두셨다
8.4.7. 태양계의 배치
8.4.8. 시간을 창조하심
8.4.9. 빛을 창조하심
8.4.10. 별들의 직임제5절 땅을 창조하심
8.5.1. 땅을 특별한 자리로 창조하심
8.5.2. 시간 과정 도입
8.5.3. 궁창을 만드심
8.5.4. 풀과 나무들을 창조하심
8.5.5. 해와 달과 행성들을 지구 둘레에 배정하심
8.5.6. 물과 공기에 사는 생명체들을 창조하심
8.5.7. 땅 위에 사는 짐승들을 창조하심제6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심
8.6.1. 창조경륜
8.6.2. 하나님의 형상 곧 인격체로 사람을 창조하심
8.6.3. 땅의 티끌로 몸을 창조
8.6.4. 영혼을 도덕적, 지성적 성품을 가진 영적 실체로 창조하심
8.6.5. 백성 삼는 언약을 체결
8.6.6.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심제7절 영적 세계를 창조하심
8.7.1. 천사들을 창조하심: 물리적 세계와 동시에 창조됨
8.7.2. 천사의 존재
8.7.3. 천사들의 지식
8.7.4. 천사들의 직임
8.7.4.1. 천사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도록 창조됨
8.7.4.2. 하나님은 그의 작정과 경륜을 천사들을 통해서 집행하심
8.7.4.3. 천사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전달
8.7.4.4. 천사들은 언약백성을 지킴
8.7.5. 천사들의 분류
8.7.5.1. 보좌들, 주관들, 정사들, 권세들
8.7.5.2. 스랍들, 가브리엘, 미가엘제8절 천사들의 범죄
8.8.1. 사탄과 그 무리가 범죄함
8.8.2. 사탄의 범죄의 시기
8.8.3. 사탄의 범죄: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반역함
8.8.4. 타락한 천사들의 수를 사람으로 채움의 문제
8.8.4.1. 타락한 천사들의 수를 사람들 중 택한 자들로 채운다는 주장
8.8.4.2. 타락한 천사들의 수를 사람들로 채움
8.8.4.3. 인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로 하심
8.8.5. 천사 창조를 부정하는 근세신학제9절 창조를 부정하는 근세신학
8.9.1. 슐라이어마허
8.9.1.1.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진술은 순전한 의존성을 표현한다는 것임
8.9.1.2. 현상대로 있는 보존을 창조라고 함
8.9.1.3. 보존은 종을 따라 새로운 개물이 나타나는 것임
8.9.1.4. 개별존재들이 새롭게 발생하는 것은 반복적인 신의 활동임
8.9.1.5. 개별사물들이 교대로 나타난 것을 보존 곧 창조로 봄
8.9.1.6. 세계를 창조된 것으로 보는 것은 전적 의존감정의 표현
8.9.1.7. 보존에서 새로운 개물들이 나오는 것이 창조활동
8.9.1.8. 성경의 시작에 창조론을 넣은 것은 지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함
8.9.1.9. 창조는 경건한 자기의식에 모순된다는 것
8.9.1.10.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역사적이 아니라는 것
8.9.1.11. 창조론 논의는 교의학의 업무가 아니라고 함
8.9.2. 칼 발트
8.9.2.1. 창조: 의존성의 관계개념
8.9.2.2. 성경의 창조 문장: 신앙 문장
8.9.2.3. 창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말하는 것
8.9.2.4. 창조 기사: 신앙 문장
8.9.2.5. 성경의 창조 역사=비사실적 역사 곧 싸가
8.9.2.6. 창조: 은혜언약의 역사를 위한 공간 마련
8.9.2.7. 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통일인 순간
8.9.2.8. 창조주 하나님도 시간적
8.9.2.9. 창조 역사는 환상에서 나온 것인데도 믿음을 요구한다고 함
8.9.2.10. 창조 사건들을 싸가로 말함
8.9.2.11. 낙원은 실재 자리가 아니고 환상에서 기원하였음
8.9.2.12. 선악의 지식 나무 싸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라는 것
8.9.2.13. 남녀 창조: 원인론적 신화
8.9.2.14. 결론: 자존하신 하나님도 없고 무에서의 창조도 없다
8.9.3. 폴 틸리히
8.9.3.1. 창조: 존재가 존재물로 나타남 곧 계속적인 일
8.9.3.2. 결론: 신은 존재자체이고 창조는 존재가 존재물로 구체화됨임
8.9.4. 칼 라아너
8.9.4.1. 창조: 인과적 사건 아님
8.9.4.2. 창조: 존재 통보로 존재자가 늘 나오는 것을 말함
8.9.4.3. 창조: 세계가 신에게 의존해 있음을 말함
제9장 섭 리제1절 섭리의 정의
9.1.1. 섭리의 두 요소: 보존과 통치제2절 섭리의 작정과 목표
9.2.1. 섭리의 작정
9.2.2. 섭리의 목표는 창조경륜을 성취함임
9.2.3. 섭리주제3절 붙드심
9.3.1. 섭리주는 만물을 그 성질과 법칙대로 보존하심
9.3.1.1. 토마스의 보존 개념: 존재를 흘러들어가게 해서 보존함임
9.3.1.2. 존재를 부어넣음이 아니고 만물을 붙드심이라고 해야 함
9.3.2. 만물이 변형되어 다른 종이 되지 않게 붙드심
9.3.3. 만물에게 생명을 주셔서 붙드심
9.3.4. 창조주는 만물의 종을 보존하심제4절 통치권의 위임과 보존을 위한 사람의 책임
9.4.1. 통치권의 위임은 창조물의 보존의 책임을 지는 것임
9.4.2. 땅을 다스림은 땅의 형질과 형체와 토질을 보존함임
9.4.2.1. 땅의 형체를 변형하여 완전한 파괴를 자행함은 불가함
9.4.2.2. 토질을 완전히 파괴함은 불가함
9.4.2.3. 처음 토질을 보존해야 함
9.4.3. 생명체들의 종을 보존해야 함
9.4.3.1. 바다의 생명체들을 종으로 보존해야 함
9.4.3.2. 공중의 새들을 보존함
9.4.3.3. 땅의 모든 동물들을 보존해야 함제5절 다스림
9.5.1. 정의
9.5.1.1. 창조주가 세운 법칙대로 움직이게 역사하심
9.5.1.2. 합리적인 피조물들의 자유의지의 결정과 행동을 막지 않으심
9.5.1.3. 허용의 작정
9.5.1.4. 다스림의 목적
9.5.2. 일반섭리
9.5.3. 특별섭리
9.5.3.1. 창조경륜을 이루시기로 정하심
9.5.3.2. 특별섭리는 범죄한 백성을 돌이킴을 목표
9.5.3.3. 복음전파를 막는 세력들
9.5.3.4. 복음전파와 적그리스도 세력들의 충돌
9.5.3.5. 기적들의 역할
9.5.3.6. 그리스도인들의 직임
9.5.4. 생명체들을 다스림은 인류 종족의 책무
9.5.4.1. 다스림은 모든 생명체의 종들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보살핌이다
9.5.4.2. 종들의 자람을 보장해야 한다
9.5.4.3. 생명체들의 생존환경을 허물면 안 된다
9.5.4.4. 멸종 상태의 생명체들을 복원하여 다시 번성하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책임이다
9.5.4.5. 허물었던 지형과 산들과 언덕들과 토질을 회복해야 한다성경 색인구약신약라틴어와 다른 언어 용어 색인서철원 소개서철원 교수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철학과 (B.A.)와 동 대학원 (M.A.)을 마치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 후 군목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으로 석사 (Th.M.),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신학박사 (Dr. Theol.) 학위를 받았으며, 학위논문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중보직 (The Creation-Mediatorship of Jesus Christ)〉은 20세기 100대 신학저술 모음인 Theologicum 에 수록되었다. 귀국 후 개혁신학연구원교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한영신학대학교 (현재 서울 한영대학교)의 석좌교수를 역임하였다.
주요 저술로는 《교의신학》(전 7권), 《교리사》, 《복음과 율법의 관계》(일어로 번역됨), 《성령신학》, 《하나님의 구속경륜》(일어로 번역됨), 《신앙과 학문》, 《복음적 설교》, 《하나님의 나라》, 《종교다원주의》, 《문화명령》, 《창조신앙》, 《기독교문화관》 등을 출간하였다.
설교집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 《복음의 개요》, 《복음의 권세》, 《성령의 사역》,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등이 있고, 출간된 주석서들은 《창세기 주석》(전 4권), 《갈라디아서》(1판), 《에베소서》 등이 있으며, 계속 주석 중이다.

이창모 2022-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