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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경배와찬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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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하나님의 전사 스데반* 본문 : 사도행전 6:8-15*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2. 1.
 

이창모 2024-12-01 16:02:58 75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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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초대교회, 자신을 이기다!* 본문 : 사도행전 6:1-7*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1. 24.
 

이창모 2024-11-24 16:30:05 246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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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여호와를 즐거이 부를찌어다!* 본문 : 시편 100:1-5*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1. 17.
 

이창모 2024-11-17 16:35:07 265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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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십자가, 언약의 피* 본문 : 마가복음 14:22-24*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1. 10.

이창모 2024-11-10 16:17:09 345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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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초대교회, 세상을 이기다!* 본문 : 사도행전 5:33-42*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1. 3.
 

이창모 2024-11-03 15:58:46 443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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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다시 핍박이 시작되다* 본문 : 사도행전 5:17-32*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0. 27.
 

이창모 2024-10-27 16:06:18 695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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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본문 : 사도행전 5:12-16* 설교 : 이창모 목사* 날짜 : 2024. 10. 20.
 

이창모 2024-10-20 16:11:42 689 더보기
신학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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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8)- 글을 시작하며마13:31-33과 눅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이에 대해 이동원 목사와 찰스 스윈돌 목사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었다(본 글 <1>에서는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만 다루고, “누룩 비유”는 다음 <2>에서 다룰 것이다).“12명의 제자들, 머지않아 그들은 70명의 제자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500명이 되었습니다. 500명은 어느 날 30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곧 이어 5000명이 됩니다. -(중략)- 곧 이어 그들은 2만 명, 3만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지는 역사의 고동 소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 66)“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40년이 채 못 되어서 복음은 모든 로마제국의 대도시의 심장부까지 전파되었고, 이들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따라서 수많은 마을들과 작은 촌락들에까지도 전파되었으며, 2세기 말쯤에는 알려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p. 444-445)위의 예들은 다 역사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역사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눅17: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겨자씨 비유”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그러나 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설령 가시적이라 할지라도(그러나 결코 가시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13:31-32과 눅13: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막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와는 전후문맥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룩 비유” 없이 “겨자씨 비유”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막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처음 깨닫고 지적한 자는, 필자가 알기에는, Arno C. Gaebelein(1861-1945)이다. 그는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교회의 비정상적이며 유해한 관료주의적 팽창과 누룩으로 표현된 죄의 주입을 통해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비유들은 악의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에 걸쳐 적용되는 예언이다”라고 말했다.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눌려 이내 묻혀 버렸고, 나중에 James M. Boice(1938-2000)에 의해 또 다시 주장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그러면 Arno C. Gaebelein은 무슨 근거로 이 비유에 나오는 거대한 겨자 나무와 누룩이 퍼진 반죽 덩이를 긍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커진, 그러나 내부는 전체가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로 보았는가? Arno C. Gaebelein의 주장을 받아들인 James M. Boice가 그의 책 “The Parables of Jesus”에서 말한 것들 중에 우선 “겨자씨의 비유”에 관한 것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James M. Boice가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겨자씨가 나무로까지 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예수께서 성장하는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셨으면,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는 비유나 백향목 씨가 레바논의 크나큰 나무 중 하나로 자라는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둘째, 마13장의 전후문맥에서 보면,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새(32절)는 이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버린 새를 악한 자(마귀)로 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마귀로 비유된 새가 조금 뒤 겨자씨 비유에서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36-43절) 사이에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이 비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끼어있다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동일한 성격의 비유라는 것을 말해준다.필자는 “겨자씨 비유”에 대한 Arno C. Gaebelein과 James M. Boic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가 비정상적인 화려함과 거대함에 매몰된 참담한 상태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슬픈 비유임에 틀림없다.- 눅13:18-19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필자의 견해“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9)누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처럼 먼저 전후문맥 속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전후문맥 속에서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이 비유 앞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13:6-9)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겉만 그럴 듯한 타락한 하나님 나라를 책망하시는 비유라는 말이다. 이는 “전후문맥에서”와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1. 전후문맥에서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향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13: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3:6)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눅13:6-9).그 후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셨다.(눅13:10-13). 이때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어겼다고 비난한다(눅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이에 대해 예수님은 회당장을 비롯한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나귀에 대한 행위와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신다(눅13:15-1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13:18)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회당장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태를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만 크고 화려한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그러나 그 속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반죽처럼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눅13:18-22)로 폭로하신 것이다.예수님은 계속해서 눅13: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에서, 또 눅13:34-35(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계속 발하신다.이렇게 눅13장 전체의 전후문맥에서 볼 때(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그 무엇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엄중한 심판의 경고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사이에 전후문맥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생뚱맞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2. 비유 속에서“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라는 증거는 눅13장의 전후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겨자씨 비유” 속에서도 차고 넘친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시작하신다(지면 관계로 <1>부에서는 “겨자씨 비유”만 다루고, <2>부에서 “누룩 비유”를 다룰 것이다).여기서 “채소밭”(κῆπος/케포스)은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을 만들어 놓고 틈틈이 채소 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하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왜 저 사람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지 바보같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예수님 당시 겨자는 향신료(양념)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겨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써야하는 필수 소비재가 아니어서 겨자를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판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 풀이었기 때문이다. 1년생 잡풀인 겨자는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서 농부들은 오히려 자기 밭이나 채소밭에 겨자 풀이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만약 어쩌다가 겨자풀이 자기 채소밭을 침범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채소밭은 못쓰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겨자 풀의 왕성한 생장으로 인해, 그 채소밭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일부러 심는 바보는 절대로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누가복음과 의미가 다른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는 단순히 “땅에 심길 때에는”이라고만 되어 있다).또 유대인이 대단히 무겁게 여기는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유대인은 결코 없을 것이다(레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율법에 의하면 채소밭에는 채소만 심어서 재배해야 한다. 채소가 자라는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어 겨자 풀을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다.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이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의 채소밭이 망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겨자 풀은 번식력과 아울러 생장 속도도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금방 크게 자란다. 보통은 3-5m, 대단히 크게 자라는 것은 8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뿌린 까닭은,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예루살렘의 겉모습과 이로 인한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내기 위해 부당하게 수많은 돈을 착복했다.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절기 때 제사 제물에 쓸 짐승을 성전에서 팔면서 턱없는 폭리를 취했으며(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를 염소 한 마리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비둘기를 준비해 오면, 제사장들이 고의적으로 흠 없는 제물로서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뜰에서 파는 값비싼 비둘기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악행은 수두룩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제 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제사를 잘 드리는 척,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의로운 척 했다.이들은 겉으로는 겨자 나무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위선으로 일관하면서도(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 속에서 몰래 누룩이 퍼지듯 속으로는 율법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누룩 비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채소밭을 쓸모없게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누룩 비유”를 더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가 없는“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와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예수님은 당시의 겉만 화려하고 웅장한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1년생 겨자 풀을 굳이 겨자 나무로 묘사하신 것은 단4:11-12(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에서 나무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바벨론은 거대한 나무이지만 이스라엘은 겉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생 잡풀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1년생 겨자 풀을 겨자 나무라고 묘사하신 것은 바벨론 제국의 나무처럼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는, 그러나 1년생 잡풀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진실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단4:11-12에서 하늘에 닿은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며, 그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바벨론 제국에 빌붙어 살고 있는 주변국의 열왕들, 부자들, 권세자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깃들이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불의한 무력으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그럼에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바벨론 제국을 흉내 내며 엄청난 크기의 겨자 나무를 가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 가지들에 온갖 잡새들(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깃들이며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참 하나님 나라였다면 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겨자 나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누룩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이에 누룩 같은 죄가 구석구석 완전히 퍼져버린 타락한 하나님 나라에 불과했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설명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잡새 같은 불법적인 권세자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께 끊임없이 비수를 들이댔던 것이다.오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커진 겨자 나무처럼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이런 교회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반드시 온갖 잡새를 모여들고 깃들인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겨자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잡새들이 날아온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날아든 잡새들을 위해 둘러서서 정성껏 안수기도도 해주고, 이런 잡새들이 교회에 많이 깃들이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기까지 한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출석해요. 우리 교회에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나 출석하시는 줄 아세요? 우리 교회에는 판검사, 변호사만 200명이 넘어요”라고 하면서 말이다(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대통령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자들 중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커다란 겨자 나무 같은 교회를 골라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는 잡새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뿐이다).그러나 겨자 나무는 1년생이므로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할지라도 1년 동안 자라다가 사라지는 잡풀에 불과하며, 결코 진짜 나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아닌 겨자 풀의 가지가 아무리 크고 굵게 자랐다할지라도 그 속이 비어있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는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설령 정신 나간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 깃들였다할지라도 겨자 풀은 1년생 잡풀이므로 깃들인 둥지의 수명은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또 겨자 나무가 있는 채소밭은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있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설령 겨자 풀의 가지가 나무처럼 튼튼하더라도 사람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에는 새들이 결코 깃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 나무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만큼이나 정상적인 새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겨자 나무는 오래지 않아 로마 제국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예수님이 1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겨자 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을 리는 결코 없다(다시 말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전진과 성장을 계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만연을 상징하는 “누룩 비유”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또 비유의 내용이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와는 그 목적과 초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면, 1년생 잡풀인 겨자 풀이 아니라 오래 동안 생존하며, 또 외관이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백향목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향목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시92:12-13/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104:16/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아마도 “마치 사람이 자기 뒷산에 갖다 심은 작은 백향목 가지 같으니 자라서 거대한 백향목이 되어, 공중의 비둘기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관한 비유는 결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웅장함과 거대함은 말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겨자씨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겨자씨 비유”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라 나무가 되어”에서 “자라”로 번역된 “ηὔξησεν”(에윅세센)은 “자라다, 늘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ὐξάνω”(아욱사노)의 ‘단순 과거’이며, “되어”로 번역된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존재하게 되다, 있게 되다, 생기다, ~이 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가 이미 다 자라서 이제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에서 “깃들였느니라”로 번역된 “κατεσκήνωσεν”(카테스케노센)도 “살다, 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σκηνόω”(카타스케노오)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나무가 된 겨자 풀의 가지에 새들이 이미 깃들였다는 말이다(참고로 “누룩 비유”가 없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자라서”(ἀναβαίνει/아나바이네이), “커지며”(γίνεται μεῖζον/기네타이 메이존), “내니”(ποιεῖ/포이에이) 등의 모든 동사는 ‘현재형’ 동사로 되어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만약 “겨자씨 비유”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보잘 것 없는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자라서 엄청나게 커지는 겨자 나무처럼 부흥하는 지상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였다면, 예수님은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미래형’(또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셔서 “자라 나무가 될 것이며(되고 있으며)”,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깃들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이후의 교회의 외적 성장과 또 화려하고 엄청나게 성장(?)할 중세 교회와 중세 교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커질 현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하나님 나라임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은 고사하고, ‘미완료 과거’도 아닌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신 까닭은 당시에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 화려하게 커져버린 고착화된 껍데기를 지적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을 면죄부 등으로 사기치면서, 크고 화려하게 키운 교회의 외적인 껍데기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로 합리화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세교회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물들, 거대한 교회의 조직과 재물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등을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대하게 자란 겨자 나무 같은 성장이며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0%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적인 이스라엘을 거대한 겨자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와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웅장한 겨자 나무에 적용시키며 기뻐하는 것은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글을 마치며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가, 중세 교회처럼 황제마저도 굴복시키는 대단한 교세와 위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외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사적인 교훈은 교회가 외적으로 커질 때 필연적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아니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교회가 커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커지는데 집착하게 되며, 그러므로 필연적인 외적 성장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이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셨듯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타락한 중세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겨자씨 한 알처럼 외적으로는 오히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나라,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계11:7-8/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증인된 삶으로 인하여 세상의 핍박을 받으며 그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계7: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그럼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므로(계13:10/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순교했으나 주의 재림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계11: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끝내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겨자씨 비유”에서의 겨자 나무처럼 거대해지고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외적으로 웅장하게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 없이 눈으로 판단하고 주판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들기며, “교회가 이렇게 크고 화려하니까 불교보다는 낫겠지?”하면서, 겨자 나무 가지에 잡새들이 깃들이듯이, 누구나 들어와 깃들일 수 있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이런 크고 힘이 강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이 될수록 더욱 커지고 힘이 강해질 것이므로 세상 나라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 나라가 친구가 되자고 거대한 겨자 나무 같은 교회에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세상 나라의 핍박으로 인한 인내도 눈물도 필요 없을 것이다.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크고 힘은 강하나 타락한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의 엄한 경고를 귀기우려 듣고, 피 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남은 자”의 교회로 다시 새롭게 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겨자 나무 같은 교회들은 오히려 필자의 피토하는 권면을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출처 :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교회 사진첩

22년 성탄 축하 공연 모습

관리자S 2022-12-25
4-6월 추천 도서

​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Ⅱ《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Ⅱ》
하나님론 -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사역하나님의 존재방식인 삼위일체 교리와 하나님의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 책이다. 근세신학은 삼위일체 교리를 완전히 제거하였으면, 로마교회와 종교개역교회는 대부분 배도를 완료했다. 서철원 교수는 교회가 구원종교로 남아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이루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교의신학 시리즈는 복음선포를 위한 설교 준비 교과서로 작성되었다. 또한 평신도들도 교의신학을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여 성경전체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전개하였다. 또 신학적인 난제들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 계시에서 유래한다.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신 것은 실체가 하나이고 동일하고 분할불가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사역의 방식은 아버지는 아들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일하신다. 삼위일체의 신비인 출생과 출래의 비밀을 성경대로 푼다. - 책에서 -
목차머리말제1장 서 론1.1. 정의
1.2. 하나님의 존재
1.2.1.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무한한 영이시다
1.2.2.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1.2.3. 하나님은 구속주이시다
1.2.4.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1.3. 하나님의 속성
1.4. 삼위일체 하나님1.5. 창조경륜
1.6. 만물 창조
1.6.1. 순간 완결된 창조
1.6.2. 전능한 창조주
1.6.3. 창조의 목표
1.6.4. 창조의 부정
1.7. 섭리
제2장 하나님의 존재제1절 하나님의 존재2.1.1. 스스로 계시는 무한한 영
2.1.2. 창조주 하나님2.1.3. 구속주 하나님2.1.4. 삼위일체 하나님제2절 하나님의 존재 증명 불필요2.2.1.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존재자이시다2.2.2.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
2.2.3. 하나님은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셨다
제3장 하나님의 속성제1절 전유적 속성3.1.1. 자존성3.1.2. 단순성과 유일성3.1.3. 무한성
3.1.4. 불변성제2절 유비적 속성3.2.1. 하나님의 생명
3.2.2.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
3.2.2.1. 하나님의 미리 아심3.2.2.2. 하나님의 지혜
3.2.3. 하나님의 의지
3.2.4. 하나님의 사랑
3.2.5. 하나님의 은혜
3.2.5.1.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3.2.5.2.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3.2.5.3. 하나님의 인자하심
3.2.6. 하나님의 의
3.2.7. 하나님의 주권
3.2.7.1. 절대적 권세
3.2.7.2. 섭리적 권세
3.2.8. 하나님의 거룩
제4장 삼위일체 하나님제1절 삼위일체 교리제2절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왔음제3절 삼위일체는 유일한 실체가 세 위격으로 계심임제4절 위격들의 관계와 구별
4.4.1. 관계에 의한 위격들의 구별
4.4.2. 교부들의 이해
4.4.2.1. 사도적 교부인 이그나치오스
4.4.2.2. 변증가 유스티노스
4.4.2.3. 안디옥의 떼오필로스
4.4.2.4. 에레나이오스
4.4.2.5. 텔툴리아누스4.4.2.6.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4.4.2.7. 오리게네스
4.4.2.8. 아다나시오스
4.4.2.9. 바실레오스
4.4.2.10.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4.4.2.11. 닛사의 그레고리오스제5절 삼위일체의 사역의 방식
4.5.1. 아다나시오스의 가르침
4.5.2. 힙폴리토스의 견해
4.5.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제시
4.5.4. 오리게네스의 강조제6절 각 위격의 사역의 방식
4.6.1. 아버지는 유래 없이 스스로 일하심
4.6.2.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일하심
4.6.3.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일하심
4.6.3.1. 에레나이오스
4.6.3.2. 바실레오스
4.6.3.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4.6.3.4. 암브로시우스
4.6.3.5. 루피누스제7절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심의 방식
4.7.1. 하나님은 스스로 계심
4.7.2. 아들의 출생
4.7.2.1. 출생: 아버지에게서 아들의 위격이 나오심
4.7.2.2. 교부들의 이해
4.7.2.2.1. 유스티노스
4.7.2.2.2. 타치아노스
4.7.2.2.3. 아떼나고라스
4.7.2.2.4. 에레나이오스
4.7.2.2.5. 텔툴리아누스
4.7.2.2.6. 힙폴리토스
4.7.2.2.7. 노바치안
4.7.2.2.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4.7.2.2.9. 오리게네스
4.7.2.2.10.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4.7.2.2.11. 아다나시오스
4.7.2.2.12. 힐라리우스
4.7.2.2.13. 바실레오스
4.7.2.2.14.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4.7.2.2.15. 닛사의 그레고리오스제8절 출생의 성경적 해명
4.8.1. 정의: 아들의 출생=하나님의 자기 객관화 자기 객관화가한 인격을 이룸제9절 성령의 출래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
4.9.1. 출래: 성령의 위격적 존재방식
4.9.2. 교부들의 이해4.9.2.1. 텔툴리아누스
4.9.2.2. 오리게네스
4.9.2.3. 아다나시오스
4.9.2.4. 힐라리우스
4.9.2.5. 바실레오스
4.9.2.6.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4.9.2.7.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4.9.2.8.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4.9.2.9. 암브로시우스
4.9.2.10. 루피누스
4.9.2.11. 아우구스티누스
4.9.2.12. 아다나시오스 신경
4.9.2.13. 다메섹의 요한네스
4.9.3. 성령의 출래: 하나님의 호흡의 방식
4.9.4. 단일 출래를 교리로, 그러나 이중 출래도 주장제10절 출래의 합당한 해명: 출래=무한한 신성의 현시
4.10.1. 정의: 성령의 출래: 하나님의 충만의 현시 무한한 신성의 현시가 한 인격을 이룸
4.10.2. 무한한 충만은 편재하심임제11절 보혜사 성령
4.11.1. 성령=보혜사
4.11.2. 보혜사 성령의 직임
4.11.3. 보혜사 성령은 믿는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심
4.11.4. 보혜사는 사람들 안에 믿음을 일으키심
4.11.5. 보혜사 성령의 내주
4.11.6. 보혜사는 구원진리를 가르치심
4.11.7. 보혜사는 믿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지키심
4.11.8. 보혜사는 거룩하게 하심제12절 원보혜사와 다른 보혜사
4.12.1. 원보혜사가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 지목
4.12.2. 그리스도는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을 청구
4.12.3.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
4.12.4. 보혜사 성령의 본질제13절 위격의 문제
4.13.1. 실체와 위격의 관계
4.13.2. 페리코레시스
4.13.3. 분리 불가한 교제
4.13.4. 신격과 위격들이 분열되지 않음제14절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현대적 이해
제5장 삼위 하나님의 사역제1절 창조
5.1.1. 창조주 아버지: 창조 작정
5.1.1.1. 사도신경과 신앙의 규범의 가르침
5.1.1.2. 로마의 클레멘트
5.1.1.3. 이그나치오스
5.1.1.4. 헤르마스
5.1.1.5. 유스티노스
5.1.1.6. 타치아노스
5.1.1.7. 안디옥의 떼오필로스
5.1.1.8. 아떼나고라스
5.1.1.9. 에레나이오스
5.1.1.10. 텔툴리아누스
5.1.1.11. 힙폴리토스
5.1.1.12. 노바치안
5.1.1.1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1.1.14. 오리게네스
5.1.1.15. 아다나시오스
5.1.1.16.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5.1.1.17. 아우구스티누스
5.1.2. 아들 하나님: 직접적 창조주
5.1.2.1. 이그나치오스
5.1.2.2. 유스티노스
5.1.2.3. 타치아노스
5.1.2.4. 떼오필로스
5.1.2.5. 아떼나고라스
5.1.2.6. 에레나이오스
5.1.2.7. 텔툴리아누스
5.1.2.8. 힙폴리토스
5.1.2.9. 노바치안
5.1.2.1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1.2.11. 오리게네스
5.1.2.12. 아다나시오스5.1.2.1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5.1.2.14. 아우구스티누스5.1.3. 성령 하나님: 창조의 완성5.1.3.1. 아떼나고라스5.1.3.2. 에레나이오스5.1.3.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1.3.4. 아다나시오스5.1.3.5. 바실레오스5.1.3.6. 닛사의 그레고리오스5.1.3.7. 암브로시우스
5.1.3.8. 루피누스제2절 구속과 구속주
5.2.1. 하나님 아버지: 구원 작정으로 구주로 고백됨
5.2.2. 아들 하나님: 구속사역 수행으로 실제 구속주이심
5.2.3. 교부들의 증거
5.2.3.1. 로마의 클레멘트
5.2.3.2. 제 2 클레멘트
5.2.3.3. 바나바스
5.2.3.4. 이그나치오스5.2.3.5. 유스티노스
5.2.3.6. 에레나이오스
5.2.3.7. 힙폴리토스
5.2.3.8. 오리게네스
5.2.3.9.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5.2.3.10. 메또디오스
5.2.3.11. 니카야 신경5.2.3.12. 아다나시오스
5.2.3.1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5.2.3.14. 닛사의 그레고리오스5.2.3.15. 칼케돈 신경5.2.4. 성령 하나님: 그리스도의 구원적용으로 구원완성
5.2.5. 교부들의 이해5.2.5.1. 이그나치오스
5.2.5.2. 에레나이오스
5.2.5.3. 노바치안
5.2.5.4.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5.2.5.5. 오리게네스
5.2.5.6. 아다나시오스
5.2.5.7. 예루살렘의 퀴릴로스
5.2.5.8. 바실레오스
5.2.5.9. 빅토리누스제6장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근세신학제1절 슐라이어마허6.1.1. 칸트의 인식론 도식으로 신학을 완전히 바꿈6.1.2. 신=순전한 의존감정을 발음하는 것6.1.3. 삼위일체 교리의 새로운 논의6.1.3.1. 삼위일체는 전적 의존감정이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있는 것
6.1.3.2. 슐라이어마허는 의존감정을 영원화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
6.1.3.3. 슐라이어마허의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 비판
6.1.3.4. 삼위일체 교리는 이방 다신교가 그리스도교에 들어와서 형성된 것이라고 함
6.1.3.5. 삼위일체 교리를 변형해야 한다고 함6.1.4. 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가?6.1.5. 성령=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통정신제2절 칼 발트
6.2.1. 하나님은 유일한 신적 존재
6.2.2. 세 위격은 세 존재방식6.2.3. 삼위일체=계시의 세 계기로서 하나님의 존재방식6.2.4. 하나님의 존재: 행동과 사건
6.2.5. 하나님의 존재: 행동과 사역들 안에
6.2.6. 하나님의 존재: 계시의 행동6.2.7. 하나님의 신성: 행동하는 사건6.2.8. 하나님의 존재=생명, 자유로운 행동, 자유로운 사건6.2.9. 하나님의 존재=자기의 결정
6.2.10. 행동과 결정 위에 신의 본질 내로 소급할 계기 없음6.2.11. 교제를 마련하심=그의 행동, 신의 본질임
6.2.12. 하나님만이 인격: 인간 예수만이 인격6.2.13. 유일한 인격적 하나님
6.2.14. 하나님의 존재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 안6.2.15.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6.2.16. 예수 그리스도=유일한 하나님
6.2.17. 선포: 예수 그리스도만=현존하시는 하나님
6.2.18.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철저히 회개한 죄인
6.2.19. 결론: 인간 예수 그리스도=유일한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이 없음제3절 폴 틸리히6.3.1. 신은 존재자체6.3.2. 신은 사람의 궁극적 관심사를 표현하는 것6.3.3. 신은 존재자체이고 존재의 기반이다
6.3.4. 존재자체가 삼위일체적 원리이다6.3.5. 틸리히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논의로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고 존재자체를 신으로 만들었다제4절 칼 라아너
6.4.1. 하이데거의 철학으로 신학을 완전 변화시킴
6.4.2. 신=존재자체, 거룩한 신비
6.4.3. 삼위일체=존재의 통보 도식제5절 위르겐 몰트만
6.5.1. 삼위일체: 십자가상의 고통의 사건
6.5.2. 삼위일체론의 근거는 신론을 그리스도인의 자기의식으로 바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함
6.5.3. 삼위일체를 십자가상의 고통의 교류의 사건으로 전개
6.5.4. 사건 안에서 기도함
6.5.5. 사랑의 사건
6.5.6. 삼위일체: 하늘의 원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온 종말론적 사건
제7장 하나님의 창조경륜제1절 경륜과 작정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
7.1.1. 작정에 대한 전통적인 세 구분
7.1.2. 일반적 작정과 특별 작정제2절 경륜과 작정에 대한 바른 성찰
7.2.1. 작정=하실 일을 미리 정하심제3절 작정과 경륜에 대한 성경적 근거
7.3.1. 하나님의 뜻을 작정으로 표현한 성경본문들
7.3.2. 경륜을 직접 표현한 성경본문
7.3.3. 예정으로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4. 작정을 직접 표현한 성경본문
7.3.5. 경영과 도모, 모략으로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6. 택하심으로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7. 인봉, 인봉한 책, 책으로 하나님의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
7.3.8.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작정을 표현한 성경본문들제4절 창조경륜
7.4.1. 창조경륜 정의
7.4.2. 창조경륜을 집행하심: 선악과계명으로 언약을 맺으심
7.4.3. 반역이 일어남
7.4.4. 반역한 백성을 구원하기로 정하심
7.4.5. 창조경륜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
7.4.5.1. 창조경륜의 확실한 성취
7.4.5.2.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백성으로 삼으심은 창조경륜의 성취를 위한 준비
7.4.5.3. 시내산 언약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심은 창조경륜의 성취를 위한 준비임
7.4.5.4. 새 언약의 목표가 창조경륜의 성취를 위한 것임을 밝힘임
7.4.5.5.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들을 구속함은 창조경륜의 성취임제5절 하나님의 작정들
7.5.1. 창조 작정
7.5.1.1. 물리적 세계를 언약백성의 거소로 창조하기로 하심
7.5.1.2. 영적 세계를 창조하시어 하나님과 언약백성을 섬기도록 하심
7.5.1.3. 백성으로 창조를 탐구하여 영원히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도록 작정하심
7.5.1.4. 영원세계에서도 창조탐구
7.5.2. 역사진행 작정7.5.3. 구원 작정
7.5.3.1. 하나님이 대신 죗값을 갚으심이 예정됨
7.5.4. 선택과 유기의 작정
7.5.4.1. 죄 때문에 창조경륜을 이루심에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세우심
7.5.4.2.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이 이루어짐
7.5.4.3. 예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작정임
7.5.4.4. 예정은 삼위의 사역
7.5.4.5.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확고하고 불변
7.5.4.6. 택자들의 수
7.5.4.7. 유기 작정제6절 선택 교리의 논의
7.6.1.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7.6.1.1. 작정의 불변성
7.6.1.2. 사람의 범죄는 신적 허락에 의해서
7.6.1.3.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 없이 되지 않음
7.6.1.4. 모든 인류의 구원은 예정된 자들만 구원되는 것을 뜻함
7.6.1.5. 하나님은 허락으로 이루시거나 실제로 자신이 이루심
7.6.1.6.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을 다 이루심
7.6.1.7. 예정은 은혜로 이루어짐
7.6.1.8. 지성적 존재의 타락을 예지하셔도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빼앗지 않으심
7.6.1.9.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룸
7.6.2.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개
7.6.2.1. 예정은 지성적 존재들을 영생으로 배정하는 것
7.6.2.2. 예정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집행함임
7.6.2.3.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음
7.6.2.4. 예정: 영생으로 배정 유기: 영생에서 탈락 허용
7.6.2.5. 예정: 영광의 원인 유기: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음임
7.6.2.6. 유기는 자유의지 박탈 아님
7.6.2.7. 조건 없는 선택
7.6.2.8. 예정은 공로와 상관없음
7.6.2.9. 예정은 확실함
7.6.2.10. 예정된 자들의 수: 확정적
7.6.3. 칼빈의 가르침
7.6.3.1. 자유의지로 공로 이룰 수 없음
7.6.3.2. 죄로 자유 박탈됨: 의 추구 못함
7.6.3.2.1. 자유의지 주창자: 이성의 지도를 받아 의지가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
7.6.3.2.2. 교부들도 의지의 자유 인정, 선행 가능성 주장
7.6.3.3. 초자연적 은사들 제거: 자연적 은사들 부패
7.6.3.4. 선의지와 선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7.6.3.5. 믿음과 선행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7.6.3.6. 본래의 자유의지는 남아 있지 않음
7.6.4. 칼빈의 선택 교리
7.6.4.1. 예정: 구원과 멸망으로 작정임
7.6.4.2. 예정 교리: 성경적 진리
7.6.4.3. 예정 교리 부정 불가
7.6.4.4. 민족적 선택과 개인의 선택의 차이
7.6.4.5. 선택과 공로 예지는 무관함
7.6.4.6. 문제점: 죄와 무관하게 예정 교리 전개
7.6.5. 종교개혁 신경들의 예정 교리 수납
7.6.5.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5.2. 영국교회의 39개조
7.6.5.3.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7.6.5.4. 제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7.6.5.5. 프랑스 신앙고백서7.6.5.6.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7.6.5.7. 돌트 신경
7.6.5.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7절 하나님의 합리적, 인격적 존재들을 다루시는 방식을 예정으로 오해함
제8장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심제1절 단번에 완결된 창조
8.1.1. 순간 완결된 창조
8.1.2. 플라톤의 창조론: 영원한 물질에서 현상으로 조성
8.1.3.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단계 창조론
8.1.4. 단번의 완성된 창조제2절 전능한 창조주
8.2.1. 창조를 작정하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8.2.2. 창조계획을 구현하신 창조주: 아들 하나님
8.2.3. 아들 하나님의 창조 중보직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
8.2.3.1. 바나바스
8.2.3.2. 이그나치오스
8.2.3.3. 유스티노스
8.2.3.4. 타치아노스
8.2.3.5. 안디옥의 떼오필로스
8.2.3.6. 아떼나고라스
8.2.3.7. 에레나이오스
8.2.3.8. 힙폴리토스
8.2.3.9. 노바치안
8.2.3.1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8.2.3.11. 오리게네스
8.2.3.12.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8.2.3.13. 아다나시오스
8.2.3.14. 예루살렘의 퀴릴로스
8.2.3.15. 암브로시우스
8.2.3.16. 루피누스
8.2.3.17. 아우구스티누스
8.2.4. 창조를 장식하고 완성한 창조주: 성령 하나님
8.2.5. 창조 진행을 마감하시는 창조주: 창조 중보자제3절 창조의 방식
8.3.1. 하나님은 그의 의지의 역사로 창조를 이루심
8.3.2. 하나님은 무에서 만물을 말씀으로만 불러내심
8.3.3. 하나님은 단번에 완결된 사물들을 만드심
8.3.4. 창조의 목표: 창조경륜…
8.3.4.1. 하나님은 그의 손의 일을 누리기를 기뻐하심
8.3.4.2. 창조주를 찬송하는 백성으로 사람을 창조하심
8.3.4.3. 언약백성으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하려고 광대무변한 우주를 창조하심제4절 하늘을 창조하심
8.4.1. 하늘을 창조 첫 순간에 다 창조하심
8.4.2. 영원물질에서 만물이 이루어졌다는 가설
8.4.3. 유출에 의한 창조는 불가함
8.4.4. 넓이와 길이의 문제
8.4.5. 하늘의 별자리들을 은하계를 중심으로 배치하심
8.4.6. 우리의 은하계에 태양계를, 그 중심에 지구를 두셨다
8.4.7. 태양계의 배치
8.4.8. 시간을 창조하심
8.4.9. 빛을 창조하심
8.4.10. 별들의 직임제5절 땅을 창조하심
8.5.1. 땅을 특별한 자리로 창조하심
8.5.2. 시간 과정 도입
8.5.3. 궁창을 만드심
8.5.4. 풀과 나무들을 창조하심
8.5.5. 해와 달과 행성들을 지구 둘레에 배정하심
8.5.6. 물과 공기에 사는 생명체들을 창조하심
8.5.7. 땅 위에 사는 짐승들을 창조하심제6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심
8.6.1. 창조경륜
8.6.2. 하나님의 형상 곧 인격체로 사람을 창조하심
8.6.3. 땅의 티끌로 몸을 창조
8.6.4. 영혼을 도덕적, 지성적 성품을 가진 영적 실체로 창조하심
8.6.5. 백성 삼는 언약을 체결
8.6.6.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심제7절 영적 세계를 창조하심
8.7.1. 천사들을 창조하심: 물리적 세계와 동시에 창조됨
8.7.2. 천사의 존재
8.7.3. 천사들의 지식
8.7.4. 천사들의 직임
8.7.4.1. 천사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도록 창조됨
8.7.4.2. 하나님은 그의 작정과 경륜을 천사들을 통해서 집행하심
8.7.4.3. 천사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전달
8.7.4.4. 천사들은 언약백성을 지킴
8.7.5. 천사들의 분류
8.7.5.1. 보좌들, 주관들, 정사들, 권세들
8.7.5.2. 스랍들, 가브리엘, 미가엘제8절 천사들의 범죄
8.8.1. 사탄과 그 무리가 범죄함
8.8.2. 사탄의 범죄의 시기
8.8.3. 사탄의 범죄: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반역함
8.8.4. 타락한 천사들의 수를 사람으로 채움의 문제
8.8.4.1. 타락한 천사들의 수를 사람들 중 택한 자들로 채운다는 주장
8.8.4.2. 타락한 천사들의 수를 사람들로 채움
8.8.4.3. 인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로 하심
8.8.5. 천사 창조를 부정하는 근세신학제9절 창조를 부정하는 근세신학
8.9.1. 슐라이어마허
8.9.1.1.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진술은 순전한 의존성을 표현한다는 것임
8.9.1.2. 현상대로 있는 보존을 창조라고 함
8.9.1.3. 보존은 종을 따라 새로운 개물이 나타나는 것임
8.9.1.4. 개별존재들이 새롭게 발생하는 것은 반복적인 신의 활동임
8.9.1.5. 개별사물들이 교대로 나타난 것을 보존 곧 창조로 봄
8.9.1.6. 세계를 창조된 것으로 보는 것은 전적 의존감정의 표현
8.9.1.7. 보존에서 새로운 개물들이 나오는 것이 창조활동
8.9.1.8. 성경의 시작에 창조론을 넣은 것은 지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함
8.9.1.9. 창조는 경건한 자기의식에 모순된다는 것
8.9.1.10.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역사적이 아니라는 것
8.9.1.11. 창조론 논의는 교의학의 업무가 아니라고 함
8.9.2. 칼 발트
8.9.2.1. 창조: 의존성의 관계개념
8.9.2.2. 성경의 창조 문장: 신앙 문장
8.9.2.3. 창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말하는 것
8.9.2.4. 창조 기사: 신앙 문장
8.9.2.5. 성경의 창조 역사=비사실적 역사 곧 싸가
8.9.2.6. 창조: 은혜언약의 역사를 위한 공간 마련
8.9.2.7. 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통일인 순간
8.9.2.8. 창조주 하나님도 시간적
8.9.2.9. 창조 역사는 환상에서 나온 것인데도 믿음을 요구한다고 함
8.9.2.10. 창조 사건들을 싸가로 말함
8.9.2.11. 낙원은 실재 자리가 아니고 환상에서 기원하였음
8.9.2.12. 선악의 지식 나무 싸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라는 것
8.9.2.13. 남녀 창조: 원인론적 신화
8.9.2.14. 결론: 자존하신 하나님도 없고 무에서의 창조도 없다
8.9.3. 폴 틸리히
8.9.3.1. 창조: 존재가 존재물로 나타남 곧 계속적인 일
8.9.3.2. 결론: 신은 존재자체이고 창조는 존재가 존재물로 구체화됨임
8.9.4. 칼 라아너
8.9.4.1. 창조: 인과적 사건 아님
8.9.4.2. 창조: 존재 통보로 존재자가 늘 나오는 것을 말함
8.9.4.3. 창조: 세계가 신에게 의존해 있음을 말함
제9장 섭 리제1절 섭리의 정의
9.1.1. 섭리의 두 요소: 보존과 통치제2절 섭리의 작정과 목표
9.2.1. 섭리의 작정
9.2.2. 섭리의 목표는 창조경륜을 성취함임
9.2.3. 섭리주제3절 붙드심
9.3.1. 섭리주는 만물을 그 성질과 법칙대로 보존하심
9.3.1.1. 토마스의 보존 개념: 존재를 흘러들어가게 해서 보존함임
9.3.1.2. 존재를 부어넣음이 아니고 만물을 붙드심이라고 해야 함
9.3.2. 만물이 변형되어 다른 종이 되지 않게 붙드심
9.3.3. 만물에게 생명을 주셔서 붙드심
9.3.4. 창조주는 만물의 종을 보존하심제4절 통치권의 위임과 보존을 위한 사람의 책임
9.4.1. 통치권의 위임은 창조물의 보존의 책임을 지는 것임
9.4.2. 땅을 다스림은 땅의 형질과 형체와 토질을 보존함임
9.4.2.1. 땅의 형체를 변형하여 완전한 파괴를 자행함은 불가함
9.4.2.2. 토질을 완전히 파괴함은 불가함
9.4.2.3. 처음 토질을 보존해야 함
9.4.3. 생명체들의 종을 보존해야 함
9.4.3.1. 바다의 생명체들을 종으로 보존해야 함
9.4.3.2. 공중의 새들을 보존함
9.4.3.3. 땅의 모든 동물들을 보존해야 함제5절 다스림
9.5.1. 정의
9.5.1.1. 창조주가 세운 법칙대로 움직이게 역사하심
9.5.1.2. 합리적인 피조물들의 자유의지의 결정과 행동을 막지 않으심
9.5.1.3. 허용의 작정
9.5.1.4. 다스림의 목적
9.5.2. 일반섭리
9.5.3. 특별섭리
9.5.3.1. 창조경륜을 이루시기로 정하심
9.5.3.2. 특별섭리는 범죄한 백성을 돌이킴을 목표
9.5.3.3. 복음전파를 막는 세력들
9.5.3.4. 복음전파와 적그리스도 세력들의 충돌
9.5.3.5. 기적들의 역할
9.5.3.6. 그리스도인들의 직임
9.5.4. 생명체들을 다스림은 인류 종족의 책무
9.5.4.1. 다스림은 모든 생명체의 종들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보살핌이다
9.5.4.2. 종들의 자람을 보장해야 한다
9.5.4.3. 생명체들의 생존환경을 허물면 안 된다
9.5.4.4. 멸종 상태의 생명체들을 복원하여 다시 번성하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책임이다
9.5.4.5. 허물었던 지형과 산들과 언덕들과 토질을 회복해야 한다성경 색인구약신약라틴어와 다른 언어 용어 색인서철원 소개서철원 교수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철학과 (B.A.)와 동 대학원 (M.A.)을 마치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 후 군목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으로 석사 (Th.M.),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신학박사 (Dr. Theol.) 학위를 받았으며, 학위논문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중보직 (The Creation-Mediatorship of Jesus Christ)〉은 20세기 100대 신학저술 모음인 Theologicum 에 수록되었다. 귀국 후 개혁신학연구원교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한영신학대학교 (현재 서울 한영대학교)의 석좌교수를 역임하였다.
주요 저술로는 《교의신학》(전 7권), 《교리사》, 《복음과 율법의 관계》(일어로 번역됨), 《성령신학》, 《하나님의 구속경륜》(일어로 번역됨), 《신앙과 학문》, 《복음적 설교》, 《하나님의 나라》, 《종교다원주의》, 《문화명령》, 《창조신앙》, 《기독교문화관》 등을 출간하였다.
설교집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 《복음의 개요》, 《복음의 권세》, 《성령의 사역》,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등이 있고, 출간된 주석서들은 《창세기 주석》(전 4권), 《갈라디아서》(1판), 《에베소서》 등이 있으며, 계속 주석 중이다.

이창모 2022-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