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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개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창모 211.♡.197.163
2025.04.23 11:12 36 0 0 0

본문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34)

 

글을 시작하며

예수께서 두로 지경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기를 간구했다. 이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는 말씀을 하셨다.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막7:27의 “개들에게”는 예수께서 이방인들을 가리키기 위한 묘사이며,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모독하는 엄청난 오석이다. 왜냐하면 딸이 귀신들려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긍휼을 구하는 불쌍한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예수님이 개라고 하셨다면, 가증스러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방인들을 개라고 경멸한 것과 다르지 않게, 예수님은 연약한 자리에 처해 있는 소자의 인격을 짓밟는 잔인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이방인을 향해 개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는 예수님의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자를 개로 지칭하면서, 그녀의 간구를 거절하시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막7:27의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막7: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2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로 번역된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ῇ”(카이 엘레겐 아우테)는 순접접속사 “καὶ”(카이/and)로 시작한다. 마가가 사용한 순접접속사 “καί”(카이)는 지금까지 모두가 잘못 해석해 온,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의 예수님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순접접속사 “καί”(카이)는 “καί”(카이) 뒤에 나오는 내용이 앞의 내용과 동일한 성격임을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καί”(카이) 뒤에 나오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καί”(카이) 앞의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26절)의 수로보니게 여자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받아들이시는 말씀이다. 만약 이 말씀이 수로보니게 여자의 요구를 거절하는 말씀이라면, 27절은 당연히 순접접속사 “καί”(카이)가 아니라, 역접접속사 “δέ”(데)나 “ἀλλά”(알라)로 시작했을 것이다.

또 “먼저”로 번역된 헬라어 “πρῶτον”(프로톤)의 원형 “πρῶτος”(프로토스)는 “첫째, 제일 이른, 먼저의, 우선”(마20:10/먼저/πρῶτοι/프로토이/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등의 의미 외에도 “특별히, 무엇보다도”(벧후3:3/먼저/(특별히)πρῶτον/프로톤/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등의 의미도 있다.

따라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는 “특별히 자녀로 배불리 먹게 할지니”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떡은 하나님의 자녀가 순서적으로 먼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πρῶτον”(프로톤)을 순서적으로 “먼저”로 이해함으로써,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녀의 떡을 먼저 먹을 수 있는 대상에서 이방인 스로보니게 여자를 제외시키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실수를 롬1: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을 근거로 합리화시킨다.

롬1:16에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의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순서가 유대인에게 먼저이며, 이방인에게 나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들 모두를 위해 하나님 나라 말씀을 선포하셨고, 또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다만 예수님이 유대 땅에 오셨으므로, 예수님이 만난 자들이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녀의 떡을 취하는 대상에서 이방인을 배제시키는 말씀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해석해 온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한참 동떨어진 자의적인 해석이다. 물론 막7:27의 “자녀로 먼저”를 구원의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며, 헬라인은 그 다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엄청난 오해이다. 그래서 “먼저”로 번역된 “πρῶτον”(프로톤)을 “특별히”로 번역하는 것이 이런 오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사역의 일 순위가 유대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마10:5-6(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의 예수님의 말씀도 사역의 순위가 유대인이 먼저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처음 선교의 길을 나서는 경험이 일천한 제자들에게, 의욕만 앞세워서 이방인의 지역이나 사마리아 지역에까지 가서 선교하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경험이 없는 신입들은 그럼에도 의욕이 앞서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일을 망치는 경우가 흔하다), 먼저 비교적 손쉬운 이스라엘 지경에서 선교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마10:5-6은 롬1:16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순서에 따라, “유대인에게 먼저 가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땅치”로 번역된 “καλὸν”(칼론)의 원형 “καλός”(칼로스)는 “아름다운, 좋은, 선한, 옳은”(막14:6/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καλὸν/칼론/ 일을 하였느니라) 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마땅치 아니하니라”로 번역된 “οὐ~ἐστιν καλὸν”(우~에스틴 칼론)을 직역하면, “나쁘다, 악하다, 옳지 않다” 등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일은 마땅치 않은, 즉 적절하지 않은 일 정도가 아니라, 나쁘고 악한 일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가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적용된다면, 예수님은 나중에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으므로. 악한(나쁜, 옳지 않은) 일을 하신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하시는 말씀이 결코 아님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지만, 만약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가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는 것이 옳지 않다(악하다)는 의미라면,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악한 일을 저지른 죄인이 되고 만다.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는 이방인을 개라고 지칭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수로보니게 여자를 인격적으로 모독한 것으로서, 예수님은 이방인을 개로 모독한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형편없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고 만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이 말씀으로 극단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불쌍한 수로보니게 여자를 시험한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지독하게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멋진 말(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에 설득되어서, 해서는 안 되는 “악한 일”을 해버린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성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해석이다.
 

예수님은 수보니게 여자에게 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막7:27의 “개들에게”가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본문의 사건보다 먼저 있었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께 도움을 요청했을 때(마8:5-6/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백부장에게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하셨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방인 백부장의 간구에 흔쾌히 응하셨다(마8:7/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또 수로보니게 여자 사건 이후에 예수님이 이방 지역(갈릴리 호수 동쪽 해변에 인접한 데가볼리 지역)에 가셔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신 사역(막7:31-37)과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칠병이어의 기적”(막8:1-9)은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개들에게”는 떡을 주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인 “개들에게” 떡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막7:27의 “개들에게”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일들은 이 말씀과 아무런 모순도, 문제도 없다.

세례 요한도 그랬지만(마3: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라고 말씀하셨지만, 보통의 유대인들이나 죄인과 세리, 창기들, 이방인들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뱀, 개, 독사의 새끼” 등의 말씀을 하신 적이 결코 없으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겸손하게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불쌍한 수로보니게 여자를 향해 예수님이 “개들에게”라는 말로, 그녀의 인격을 모독하셨을 리는 단연코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겸손하게 나아와 도움을 청하는 자들을 외면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들에게”는 결코 수로보니게 여자, 즉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에 틀림없다.

어떤 이들은 “개들에게”로 번역된 “κυναρίοις”(퀴나리오이스)의 원형 “κυνάριον”(퀴나리온)은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자를 생각해서 사용한 지소사로서, “애완용 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개를 비롯한 짐승을 애완용으로 기르는 일은 없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개는 결코 애완용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야생 동물을 의미하는 개는 “κύων”(퀴온)이며(빌3:2/개들을/κύνας/퀴나스/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본문의 “κυνάριον”(퀴나리온)은 아마도 부잣집에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용이나 방범용으로 기르는 개(house dog)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κύων”(퀴온) 대신에 “house dog”을 의미하는 “κυνάριον”(퀴나리온)을 사용하신 까닭은,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이방인을 좀 순화해서 지칭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집” 안에서 설치고 다니는 “house dog”과 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변되는 소위 경건을 가장한 가증스러운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병행 본문 마15: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은 막7:27보다도 더 심각하게 오석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막7:27은 “καὶ”(카이/and)로 시작하지만, 마15:24는 “δὲ”(데/but)로 시작한다. 마태가 본문에서 역접접속사 “δὲ”(데)를 사용한 까닭은 “δὲ”(데) 앞에서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15:23)라고 한 것처럼, 이방여자에 대한 제자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δὲ”(데)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긍정적인 반응이 서로 대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δὲ”(데) 뒤에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은 이방인을 거부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이 이방인을 거부하는 그 말을 거부하시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로 번역된 “οὐκ ἀπεστάλην”(우크 아페스탈렌)에서 “ἀπεστάλην”(아페스탈렌)은 “보내다, 내보내다, 떠나보내다”(마22:16/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ἀποστέλλουσιν/아포스텔루신/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의 ‘단순과거 수동태’로서 ‘신적 수동태’이다.

그러므로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가 이방인에게 보내시지 않았다는 의미가 맞는다면,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갔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셈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15:24의 “이스라엘 집”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본질적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국경 밖에 있는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양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유대인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출12:37-38(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수많은 잡족”, 즉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집”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 니고데모와 같은 죄인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기들인 유대인들과 더불어 백부장과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자,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자와 같은 이방인들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누구를 가리켜 개들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에서의 “개들”은 그 동안 예수님의 축귀 사역을 놓고,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막3:22)고 비난함으로써 성령을 모독하고,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짓밟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가증스러운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발로 밟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떡을 주시지 않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마7: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따라서 27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의 말씀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해 오신 사역,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떡을 주지 않으시고(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떡을 주지 않는 방편으로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다), 세리들, 죄인들, 창기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떡을 주신 사역의 정당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며, 확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적대하는 더러운 개들과 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먹을 수 있는 자녀의 떡을 베푸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며,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께 나아와 긍휼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먹을 수 있는 자녀의 떡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사실상 수로보니게 여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고, 그녀의 간구를 받아들이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수로보니게 여자는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수없이 들어왔던 개라는 말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간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선하신 성품에 어울리지 않게 수로보니게 여자를 시험하시려고, 개라는 모욕적인 말로, 그녀를 인격적으로 모독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더러운 개처럼 가증스러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수로보니게 여자와 같은 이방인들을 개로 여기며 경멸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수로보니게 여자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규정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위선적인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집” 안에서 어슬렁거리는 “개”(κυνάριον/퀴나리온/house dog)로 규정하신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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