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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그 불편한 진실-12

이창모 117.♡.245.9
2021.08.30 21:07 3,172 0 0 0

본문

오순절주의 방언은 왜 하면 안 되는가?

                       


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2회)
502_993_3554.jpg▲ 이창모 목사

고린도전서 14장 2절, 4a절을 특징으로 하는 방언은 왜 하면 안 되는가? 고린도전서 14장 2, 4a절로 설명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의 방언이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교회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짓 방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고 말함으로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4a절에서도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고 말함으로, 이들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무관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고린도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이 심각한 이유는, 성령이 교회에 방언을 주신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인데도, 이들의 방언은 교회(지체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므로 교회의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며,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 방언이 예배에 난무한다는 것은 교회가 예배에서 성령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런 거짓 방언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표적이 될 것이다(고전14:21-22 참고).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공동체에 유익을 줄 수 없는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5절에 언급된 방언은 외국인이 예배에 참석했을 때 외국인을 대상으로 말하는 방언이다. 이때 외국인에게 말한 방언이 통역되지 않으면(이런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가정법을 쓰고 있다) 현지인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 할지라도 통역되지 않으면, 현지인 신자들에게 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보다 못한 것이 된다. 그리고 6절에서 바울은 방언의 대상자를 현지인 신자들로 가정하고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라고 말함으로써 방언의 불소통 문제를 이들의 피부에 와 닿도록 더욱 실감나게 설명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14:6).

바울이 여기서는 왜 통역을 말하지 않았을까? 만약 방언이 통역된다면 예언만큼은 아니더라도 교회에 유익이 되는데 말이다. 그것은 6절의 상황은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일차적인 대상이 현지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인들이지 서로 말이 통하는 현지인 신자들이 아니다. 방언의 일차적인 대상인 외국인들은 통역 없이도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들과 함께 예배하는 현지인들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본문에서 방언을 듣는 자들은, 즉 바울이 말하는 “너희”는 고린도교회의 현지인 신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 굳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고 또 통역할 이유가 없다. 현지어로 바로 말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비록 가정이기는 하지만 ‘너희에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도무지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외국인이 없는데도 방언을 말하는 거짓방언자들의 방언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거짓 방언임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바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많이 방언으로 말했을 것이다(고전14:18). 그러나 바울은 말이 통하는 현지인들에게는 방언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6절에서 바울이 ‘눈 데’(Nu/n de, , 한글 성경에는 ‘그런즉’으로 번역했다)로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헬라어에서 ‘눈’(Nu/n, 지금)과 ‘데’(de,, 그러나)를 함께 쓰는 것은, 실제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상황과 대조시킬 때 쓰는 용법이다.1) 따라서 6절을 ‘눈 데’로 시작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현지인 신자들에게 방언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2)

또 뒷말에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이라고 가정법(eva.n, 에안)을 쓴 것은 바울이 현지인 신자들에게 계시나 자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칠 때에는 현지어(헬라어)로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현지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이때의 방언은 틀림없이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일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의 대상이 외국인이 아닌데도 성령이 현지인 신자들에게 방언을 말하도록 역사하실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바울이 가정법을 써서까지 말하는 것은 고린도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이 외국인들은 없고 현지인들만 있는 상황에서 하는 거짓 방언이라는 뼈아픈 현실 때문이다. 이들은 현지인들 앞에서 방언을 말하면서도 현지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현지인 신자들이 이들의 방언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의 거짓방언자들이 현지인 신자들 앞에서 방언을 말하는 목적은, 현지인 신자들에게 방언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들 앞에서 자신의 높은 영적 위상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 위장한 거짓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거짓 방언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우리가 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의 방언이 정말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므로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은사가 틀림없다면, 방언은 예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사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예언보다 방언하기를 더 적극적으로 원했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방언이 아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이 거짓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또 설령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5절에서 바울이 방언을 권했다고 하더라도 방언보다 예언을 더 강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5절에서 ‘바울이 방언을 권했다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고린도전서 14장 2, 4절과 같은 거짓 방언은 물론이고,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도 강조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교회는 가끔씩 방문하는 소수의 외국인들에게 필요한 방언보다는 항상 있는 다수의 현지인 신자들에게 필요한 예언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6절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불소통의 방언을 포기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공동체(교회)와 소통되지 않는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7-8절에서 불소통의 방언이 주는 무익함을 악기 소리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14:7-8).

생명이 없는 피리나 거문고 같은 악기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소리가 있다. 그런데 만약 악기가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악기 소리를 듣고도 그 악기가 무슨 악기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3) 또 전투에서 나팔수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분명한 나팔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아군은 그 전투에서 패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악기 소리들을 비유로 들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생명이 없는 악기들도 음을 분별할 수 있는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면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내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특히 그 소리가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외국인의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성령은 통역의 은사를 주셔서 현지인 신자들도 방언이 담고 있는 소리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듣는 사람이 방언의 내용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바울은 소통되지 않는 방언이 주는 무서운 위험을 전투 나팔 소리로 비유해 고린도 교회에 경고하고 있다. 전투에서 나팔수가 나팔을 잘못 분다면 어떻게 될까? 지휘관이 공격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는데, 후퇴를 알리는 나팔 소리를 낸다면 그 군대가 전쟁에서 질 것은 뻔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알아들을 수 없었던 앗수르 방언이 전쟁에서 패하는 이스라엘의 심판의 표적이 되었듯이, 고린도 교회의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도 영적 전쟁에서 패하는 고린도 교회의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은 불을 본 듯 명백한 일이다(고전14:22 참고).

의미 없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거짓 방언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도리어 심각한 해만 끼친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는 이런 거짓 방언을 신령함의 최고봉으로 여기며 열심히 사모했고, 예배 때마다 예배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방언으로 열심 떠들어 댔으니, 이것이 이들에게 어찌 심판의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악기가 분별할 수 없는 음을 낼 때 어떤 특별한 장치, 예를 들면 특수한 이어폰이나 증폭기 같은 것을 사용하면 그 음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악기가 분별할 수 없는 음을 내면, 어떤 장치를 사용해도 분별할 수 없는 악기의 소리를 분별할 재간은 없다. 왜냐하면 분별할 수 없는 음에는 그 음을 분별할 수 있는 소리의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그 소리를 확대하거나 세밀하게 해서 듣는다 해도, 없는 소리의 색깔을 구별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방언도 마찬가지다. 분별할 수 있는 외국어로 된 방언을 말할 때는 외국인은 물론, 통역을 통해 현지인 신자들도 그 소리를 분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방언은 사람이 분별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별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은 언어가 아닌 잡소리이기 때문에, 외국인은 물론이고 현지인 신자들도 그 소리를 분별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장치를 사용해도 분별할 수 없는 악기의 소리를 분별할 수 없듯이,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도 설령 통역이라는 수단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그 소리의 뜻을 분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람이 분별할 수 없는 방언을 말해놓고는 또 그 소리를 분별하겠다고 통역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이런 소통되지 않는 방언은, 방언을 듣는 자들뿐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도 방언의 소리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4)

그러나 거짓 방언이 교회에 주는 폐해는 소통되지 않아서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보다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 난무하는 거짓 방언은 지체들 간에 서로 외국인이 되게 하며(고전14:11), 교회가 예언을 통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고, 예배를 혼란에 빠뜨림으로 결국 교회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7-8절의 악기 비유를 근거로, 9-11절에서 거짓 방언이 주는 폐해를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거짓 방언은 교회에 심각한 폐해를 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9절에서 거짓 방언이 주는 소극적 폐해를 지적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14:9).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는 거짓 방언의 소극적 폐해는 ‘헛수고’다. 비록 거짓방언자들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므로 허공에다 말하는 ‘헛수고’라는 것이다. 어쩌면 바울은 허공에다 말하는 쓸데없는 거짓 방언을 미리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를 동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피리나 거문고 같은 리듬 악기는 그 악기의 고유한 음색과 함께 음의 높낮이와 길이 그리고 강약으로 소리에 의미를 담아 듣는 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구리나 꽹과리 같은 타악기들은 음의 높낮이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소리에 정교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없다. 만약 이런 종류의 악기로 크고 빠르게 쳐 대기만 한다면, 아마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이 구리나 꽹과리를 치는 자들에게 미쳤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고전14:23 참고). 이렇게 정신없이 마구 두들겨대는 귀청 터질듯 한 구리와 꽹과리 소리는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의 광란에 가까운 방언기도 소리와 닮았다. 바울은 이어 10-11절에서 거짓 방언이 주는 적극적인 폐해를 지적한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고전14:10-11).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는 거짓 방언의 적극적인 폐해는 교회의 지체들이 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외국인’이 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소리”로 번역된 헬라어 ‘포네’(fwnh)는 ‘소리’(sound)라는 의미와 함께 ‘언어’(language)라는 의미도 있다. 7절과 8절에서는 ‘포네’가 ‘소리’라는 의미로 쓰였지만, 10절의 ‘포논’(fwnw/n-fwnh의 복수)은 ‘다양한 언어들’이라는 의미로 쓰였음에 유의해야 한다.5)

영어 성경에서는 이 차이를 구별해 7절의 ‘포네’(fwnh)는 ‘sound'로, 10절의 ‘포논’은 ‘so many kinds of voices'(KJV), 'all sorts of languages'(NIV)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뜻이 없는, 즉 소통할 수 없는 소리(언어가 아닌 소리)를 다른 사람에게 낸다면, 그 소리를 내는 사람과 그 소리를 듣는 사람 모두는 서로에게 ‘외국인’이 될 것이다. 11절에서 “외국인”으로 번역된 헬라어 ‘바바로스’(ba,rbaroj)는 ‘야만인’을 뜻하는 말로, 당시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당시 헬라인들은 헬라어의 아름다움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헬라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촌스럽게 여겼고, 귀에 거슬려했다.6) 그래서 헬라인들은 헬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은 ‘바~바~’처럼 시끄럽게 들린다고 해서 헬라어를 모르는 자들을 ‘바바로스’(야만인)라고 불렀다.7)

바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바~바~’하는 거짓 방언의 소리를 염두에 두고 여기서 ‘바바로스’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11절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폐해는,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을 말하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는 서로에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외국인처럼 된다는 것이다. 이런 폐해는 16-17절에서도 언급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14:16-17).

여기서 바울이 고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영으로 축복하는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 고린도전서 14장 10-11절과 16-17절에서의 방언이 정상적인 외국어 방언이었다면, 5절에서처럼 바울은 통역을 제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을 통역하면 소통이 되므로 서로에게 외국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거짓 방언이 주는 가장 무서운 폐해는 교회의 지체들 간에 서로 외국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불소통의 거짓 방언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지체들이 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외국인이 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서로에게 외국인이 된다는 것은 한 몸인 교회가 와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몸의 지체들이 서로 소통되지 않아 각각 따로 움직인다면, 우리 몸은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불소통의 방언 때문에 몸의 지체들이 서로 소통되지 않아 따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비극을 맞게 되었다. 따로 모여 당을 짓고, 세상보다 더 심한 음란죄를 범하고, 형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비방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자신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복음의 핵심인 죽은 자 부활도 믿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의 비극은 불소통의 거짓 방언으로 말미암아 지체들 간에 서로 외국인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고린도 교회가 거짓 방언을 빨리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거짓 방언이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거짓 방언은 자기 자신과도 소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14-15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가 그 기도의 내용을 자신도 모르는, 즉 자신과의 불소통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4-15).

거짓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알아듣는 자가 없으므로’ 다른 지체들과의 불소통 뿐 아니라 거짓 방언을 하는 당사자도 방언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과도 소통되지 않는다. 또 방언기도를 하는 자는 자신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비밀도 들으실 필요가 없으실 뿐 아니라, 거짓 방언을 들으실 리는 더 더욱 없으므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과도 소통되지 않는다. 이렇게 거짓 방언의 가장 큰 문제는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14절에서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즉 황홀경에 빠진 채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8)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즉 자신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하므로 방언기도의 불소통을 단호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15절에서 “나는 정상적인(내가 아는 말로 하는) 기도와 찬양을 할 것이다”라는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밝힘으로 방언기도를 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바울이 기도로서의 방언을 말한 최초의 인물이며,9) 바울 자신도 방언으로 기도했으며,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로(고전14:18), 바울은 방언기도를 자랑스럽게 여긴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이런 이해는 고린도전서 14장 14절 이하 20절까지의 본문을 아마추어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생긴 어처구니없는 결과이다.

----각 주----

1) 눅19:42; 요8:40; 고전5:11에서도 같은 용법의 표현을 쓰고 있다.

2)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 11[2]), p.44.

3) 여기서도 바울은 가정법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피리로 구리 소리를 낼 수 없고 거문고로 꽹과리 소리를 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전14:2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결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낼 수 없다.

4) 방언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방언을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을 말하는 자도 자신이 말하는 방언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집에 가서 혼자 한다 해도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5) 레온 모리스, 고린도전서, 정일오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240.

6) 롬1:14의 “헬라인이나 야만(바바로스)이나”라는 표현의 순서도 이런 헬라인들의 사고방식이 반영된 것이다. 크레이그 키너, 신약배경주석(신약), 정옥배 외 옮김(서울: IVP, 1998), p.558.

7) 데이비드 프라이어, 고린도전서, 정옥배 옮김(서울: IVP), p.330.

8)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이용중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88.

9)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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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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