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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그 불편한 진실-13

이창모 117.♡.245.9
2021.09.23 18:27 2,868 0 0 0

본문

'나의 영', '나의 마음'의 바른 의미는?

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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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열며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4-15).

위의 본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바울을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변호하는데 쾌재를 부르며 사용하는 본문이다. 반면에 은사중지론자들에게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오순절주의자들의 유력한 증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순절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당혹스러운 악재로 작용한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차라리 이 본문은 없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오히려 방언의 불편한 진실을 밝히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본문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린도교회의 방언의 불편한 진실이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 “나의 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본문에서 방언기도를 설명하면서 왜 하필 가정법을 썼을까? 자신의 풍부한 방언 경험을 바탕으로 직설법으로 방언기도를 설명했다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즉,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이럴 것이다.” 보다는 “내가 방언으로 기도했더니 이렇더라.”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직설법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풍부한 방언기도의 경험이 있었다면, 자신의 방언기도의 경험을 더 설득력이 있는 직설법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서는 직설법으로 자신이 방언을 많이 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방언기도를 많이 했다는 말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방언으로 말한 경험이 많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결코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비록 설득력은 직설법보다 못하지만 가정법을 써서라도 고린도 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기도의 심각한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a절이 가정법이며, 주어가 일인칭(바울 자신)인 이유는 바울이 “영으로” 방언기도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고린도전서 14장 16절이 직설법이며 주어가 이인칭(고린도교회)인 이유는 고린도교회는 “영으로” 방언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14절의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말은 바울이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살펴보자. 오순절주의자들은 14절에서 바울이 ‘방언기도는 나의 영이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성적(마음)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지만 영이신 하나님께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이해한다.1) 또 이들은 15절에서 바울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방언기도도 하고 또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일반적인 기도도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여긴다(물론 찬송에 대해서도 같은 다짐을 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거짓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15절에서는 방언기도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외국인을 상대로 방언으로 말한 적은 많았지만(고전14:18을 보라. 여기서는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14절에서처럼 가정법을 쓰지 않고 직설법을 쓰고 있다), 결코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을 감사했지, ‘방언으로 더 많이 기도한 것’을 감사하지는 않았다.2) 바울은 어디에서도 방언기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4절-19절(특히 19절)에 걸쳐서 방언기도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3)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가 무슨 의미인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의 구성 요소 중 ‘영’4)과 ‘마음’은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즉, 자신의 영이 자신의 마음이 알지 못하게 어떤 비밀을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은 인격, 감정 등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5), 또 인간은 인간 자아의 중심이며 의식의 중심인 자기의 영을 통하여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과 뜻하는 것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6)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그래서 성경 어디에서도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한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거짓 방언을 구사하던 자들은 자신의 방언을 마치 이성이 관여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을 향해 영이 독립적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당시 헬라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이교적인 관점이다. 당시 사람들은 헬라의 이방 신전에서 사제들이 하는 예언이나 신탁에 대해 일반적으로, “영은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지 않고, 영에 의해 드러난 신탁이나 예언은 신적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7)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이 자신의 방언을 이성이 관여하지 못하는 영의 활동으로 말하는 것은, 과거 우상에게 끌려 다녔던 경험(고전12:1)을 토대로 자신의 방언이 이방 신전의 사제들처럼 신적인 것임을 드러내려는 심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또 이 말은 이들의 방언이 이방 신전의 방언을 베낀 증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심증은 고린도전서 14장 15a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바울의 말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거짓 방언을 하는 자들이 자신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방언으로 회중 앞에서 기도와 축복뿐만 아니라 찬송도 한 것으로 보인다.

예배에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소리로 신을 찬송하는 것은 당시 이방 신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8)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이런 괴상한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기록은 없다. 왜냐하면 이런 형태의 찬송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찬송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노래에 실어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 행위이다. 그런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찬송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이런 찬송이 더 영적이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을 받으실 때 특별히 더 선호하시는 언어적인 수단이 따로 있는가? 없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말로 찬송할지라도 다 알아들으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언어적인 한계 때문에 완벽한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는 겉보기 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의 자녀들이 찬양할 때, 무슨 특별한 언어적인 수단이 따로 필요하다면, 그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일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가 영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는 최고의 찬송인 ‘방언 찬송’9)이 사실이라면,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도대체 무슨 찬송이란 말인가? 하나님께 다이아몬드(방언)로 된 찬송을 하고 난 뒤에 또 깡통(보통 언어)으로 된 찬송도 하겠다는 말인가? 정말 방언 찬송이 최고의 찬송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는 바울이 방언 찬송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음 26절을 보라! 바울은 “찬송시”와 “방언”을 따로 언급하므로 이 둘을 구별하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바울은 왜 “찬송시”와 “방언”을 따로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찬송시”와 “방언”이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찬송시”에 방언으로 하는 “찬송시”는 없으며, “방언”에 찬송으로 하는 “방언”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은 이방 신전에서나 하는 이상한 소리의 노래를, 자신의 높은 영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로 가장해 예배 안으로 들여온 것이다.’10) 이들은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며 신령하게 방언으로 찬송하지만, 이들의 방언 찬송은 고린도 교회를 침몰시키려는 사탄의 노래일 뿐이다마찬가지로 현대 교회에서, 특히 신사도주의 집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방언 찬송(이들의 말로는 방언 찬송은 방언의 최고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은 수많은 영혼들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교회 판 ‘로렐라이 언덕의 노래’11)일 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5b절에서 바울이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한 말은 방언 찬송도 하고 일반적인 찬송도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뒤에서 보겠지만 고린도전서 14장 15a절에서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영과 마음이 함께 하는, 즉 내가 아는 말로 하나님께 찬송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이 굳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영지주의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는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과 14절을 근거로 방언 기도하는 자의 “영”과 “마음”이 마치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방언은 영이 하나님께 기도(또는 찬송)하는 것이므로 영이 하는 말을 마음(이성)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오순절주의자가 아닌 자들도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내 영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에,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영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은근히 과시한다.12) 오순절주의자들은 바울도 그렇게 했다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소리로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하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자랑스럽게 방언 찬송을 하기도 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도대체 인간의 ‘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런 웃지 못 할 촌극을 벌이는 것일까? 다음에 소개하는 방언 전도사 김우현 PD의 말을 보면 ‘영’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이해가 얼마나 유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울이 방언에 대해 설명한 말씀을 읽고 매우 놀랐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달리 영으로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의 언어가 나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13)

"나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같이 깊고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내 영이 점점 낮아지고 점점 충만해져 갔다. 성령님의 생수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14)

"이 공격을 그냥 방치해두면 안 될 것 같아 작업실 근처 공원으로 나가 기도했다. 그러자 영이 맑아지며 성령님의 임재를 느꼈다."15)

"나는 그들과 기도하면서 내 영이 아파하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16)

"말씀이 내 영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기름부음이 되고 권능이 되었다."17)

"무조건 순종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이미 내 영에 새겨져 있었다. 너무나 아픈 고통 같은 무엇이 내 영에 번지는 것을 느꼈다."19)

김우현 PD의 책 속에서 이런 표현들을 찾아 나열하자면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김우현 PD는 의도적으로 ‘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차별화된 표현으로 자신의 영성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함을 은근히 과시하려는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김우현 PD는 ‘영’이 하는 일을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20), 자신은 ‘영’이 하는 일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이렇게 모순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말들이 사실은 지어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21)

14절의 일반적인 주석의 예를 하나 살펴보자.

"영은 사람의 구조에서 최고의 부분으로 하나님의 영과 통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영은 직관적이요 감각적이다. 그래서 영은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이해의 좌소다. 따라서 추론적이기 때문에 뜻을 분간할 수 없는 방언 기도에는 참여하지 못한다."22)

이런 해석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이런 일은 이방 신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참으로 무책임한 주석이 아닐 수 없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의 ‘영’과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는 곳은 없다.23) 위의 주석에 따르면, 영이 하는 것을 마음이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영이 하는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마음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영지주의적인 망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면 성경은 인간의 영과 마음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내 영(루아흐, spirit)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시142:3).

만약 영의 일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이 시편 기자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영이 속에서 상하는 것을 마음(이성)이 알 수 없는데도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계22:6).

하나님이 “선지자들의 영”만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마음과 육체의 하나님은 아니시란 말인가? 여기서 “선지자들의 영”은 선지자들의 전인격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체나 마음이 배제된 ‘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요한이 여기서 ‘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본문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성령)이 주시는 계시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영과 마음이 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은 한글 성경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한글 성경에서 “심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프뉴마티’(pneu,mati, 영)이다. 그런데 ‘프뉴마티’를 단순히 ‘영’으로 번역하지 않고 ‘심령’(心靈: 마음과 영)으로 번역한 것은 영과 마음이 별개의 것이기는 하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번역일 것이다. 이런 번역 경향은 한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프뉴마티, pneu,mati)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1:80).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프뉴마티, pneu,mati)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2:13; 엡4:23; 빌4:23; 골2:5; 딤후4:22; 몬1:25 등). 또 성경에서 ‘영’과 ‘마음’을 병기한 곳은, 고린도전서 14장 14-15절 외에 시편 51편 10절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마음”과 “영”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본문에서 시인은 그것을 구별하려고 “마음”과 “영”을 번갈아 쓴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은 같은 의미인데 시적으로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시인의 이런 표현은 ‘내가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를 반복해서 강조하되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쓰지 않으려는 히브리적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표현 기법이 가능한 것은 “마음”과 “영”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따로 작동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합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에게서 ‘영’과 ‘마음’은 결코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즉 ‘영’이 말하는 것을 ‘마음’(이성)이 모를 수 없다는 말이다.24) 그럼에도 ‘영’과 ‘마음’이 따로 작동하여 ‘영’이 하는 말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붕(멘탈 붕괴, coma) 상태에서나 가능한 현상일 것이다.25)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한 다음 말씀들을 보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26) 우리는 이런 이성적인 인식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된다(롬8:15). 그러므로 이 본문은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하시는 증언을 우리가 이성(마음)으로 알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영’이 하는 일을 ‘마음’(이성)이 알 수 없다면,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는 것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줄 알 수 없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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