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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그 불편한 진실-15

이창모 117.♡.245.9
2022.02.09 12:38 2,611 0 0 0

본문

거짓 방언기도에 대한 바울의 폭탄선언

                        


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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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

바울은 방언기도를 한 적이 없다. 위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방언을 더 많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1)하듯이 방언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고린도교회의 방언기도와 전혀 다른 것임을 선언하기 위함이다.

바울이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방언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방언(외국어)이다. 본문에서 “방언을 더 말하므로”는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부딪히면서 이들에게 방언으로 복음을 전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이 경험한 적이 없는 방언기도를 말할 때에 가정법을 쓴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직설법을 쓰고 있다. 바울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으로 말할 기회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통역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방언을 알아듣는 외국인들에게는 통역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2)

바울은 본문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18절을 근거로, 바울이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방언기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주장한다.3) 이들은 바울이 “방언을 더 말하므로”를 방언기도를 더 많이 한 것으로 말함으로써4) ‘방언 말하기’를 슬쩍 ‘방언기도’로 바꾸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5)

김신호 목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기도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으로, 찬양 중에나 혹은 개인기도 중에 누구보다도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했고, 우리에게 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6)라고 말함으로 똑같은 속임수를 쓰고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이런 속임수는 고린도전서 14장 39절(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을 설명할 때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들은 바울이 ‘방언기도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18절에서처럼 39절에서도 ‘방언 말하기’를 ‘방언기도’로 바꾸어 버리고는 방언기도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바울 가르침을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과연 그런가?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비판하다가 18절에서 갑자기 자신이 그런 방언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바울이 지금 감사하고 있는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즉 ‘외국인에게 말하는 방언’이다.

바울은 18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바울은 지금 방언에 대한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말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에 자신이 이들의 방언을 비판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시위하고 있다. 바울의 이런 시위는, 고린도전서 14장 36-38절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방언에 대한 자신의 책망이 거짓 방언자들에 의해 강하게 저항 받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이 방언을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방언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고린도 교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 방언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한다면, 19절 이하에서 터뜨릴 거짓 방언에 대한 폭탄선언을 더욱 통렬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에 대한 바울의 폭탄선언

바울은 자신의 풍성한 방언 경험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난 뒤, 19절에서 ‘데’(de., 그러나) 보다 더 강한 부정접속사 ‘알라’(avlla.)를 써서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에 대해 통렬하게 폭탄선언을 시작한다.

그러나(avlla., 알라)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본문에서 바울은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는 다섯 마디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고전14:14) 방언 일만 마디와 비교하므로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를 통렬하게 폭로한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일만 마디 방언을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아무리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말과 비교하여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일만 마디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오히려 한 마디 방언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깨달은 일만 마디 말보다 월등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바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과 인간의 말을 10,000(헬라어에서는 일만이라는 숫자가 가장 큰 숫자다) 대 5로 비교하면서, 그래도 인간의 다섯 마디 말이 더 낫다고 말했다면, 어떤 경우에도 바울은 성령을 모독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7)

그러나 바울이 성령의 은사를 비하함으로 성령을 모독했을 리는 없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일만 마디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외국인들을 위한 방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만들어낸,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거짓 방언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 거짓 방언을, 깨달은 인간의 말과 얼마든지 10,000 대 5로 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방언과 인간의 언어를 10000 대 5로 비교하는 것은 본문의 방언을 개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본문의 “일만 마디의 방언”을 거짓 방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은사를 능멸하고 있으며, 바로 앞에서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 말은 바울의 주책으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고린도 교회에서 거짓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방언이,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교회(지체들)를 축복하는 방언이기 때문에(고전14:16) 깨달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말보다 일만 배는 더 교회에 유익하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이 주신 외국어 방언이라 할지라도 현지인 신자들에게는 통역이 되어야 그나마 유익이 있다(고전14:5)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은 일만 마디라 할지라도 인간이 깨달은 다섯 마디 말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쓸데없는 것이 분명하다. 18절과 연계해서 19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방언에 대한 수많은 경험이 있지만, 교회에서 현지인 신자들을 가르칠 때 방언을 사용한 적은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교회에서 남을 가르칠 때는 깨달은 마음으로, 즉 네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말로 가르쳐라. 설령 그 말이 다섯 마디밖에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하는 자나 듣는 자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나을 것이다.8)

거짓 방언이 쓸데없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19절을 기도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깨달을 수 있는 다섯 마디 말로 기도하는 것이 내가 알 수 없는 일만 마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낫다.

‘방언기도는 악이므로 버려야 한다’는 바울의 명령

바울은 14-19절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에 방언을 버리라는 명령을 다음과 같이 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바울의 이 말은 독립적으로도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도 전후 문맥 속에서 읽어야 바울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울이 지금까지 해 온 거짓 방언과 관련해서 고린도 교회에 무엇인가를 명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지혜”와 “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혜”로 번역된 헬라어 ‘프레신’(fresi.n)은 주로 ‘사고’(thinking), ‘이해’(understanding) 등의 의미로 쓰이는 ‘프렌’(frh,n)의 복수형인데, 특이하게도 바울은 지금까지 “지혜”의 의미로 주로 사용했던 ‘소피아’(sofi,a)를 여기서는 쓰지 않았다.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프레신’의 단수 ‘프렌’은 ‘횡경막’, ‘격막’, 즉 ‘심장’과 ‘폐’를 의미하는 단어다. 고대인들은 몸의 이 부분에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겼으므로 자연스럽게 ‘프렌’은 지성을 담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실제로 ‘프렌’은 바울이 14절과 15절에서 사용한 ‘누스’(nou/j, 마음)와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9) 따라서 본문의 ‘프렌’은 ‘지혜’보다는 ‘마음’이나 ‘이해’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바울은 마음(지성)과 상관없는, 즉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고린도 교회에 ‘지성적으로 아는 것, 즉 생각하는 것’(이것은 15절에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19절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의 가치를 아는 ‘지혜’에는 어린아이처럼 서툴거나 어리석지 말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여기서 또 한 번 반지성적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있다.10)

본문에 언급된 지혜는 넓은 전후 문맥(고전12-13장) 속에서 보면, 은사를 성령의 뜻대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는 교회를 사랑할 줄 아는 지혜이며,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할 줄 아는 지혜다. 또 좁은 전후 문맥 속에서 이 지혜는, 바로 앞에서 바울이 내린 결론대로 다섯 마디 말이라도 서로 소통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나와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유익한지를 아는 지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주신 성령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지혜에 머물렀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는 대신에 자신의 육신적 욕망을 채우는 데 쓰려고 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자신을 위해서는 쓸 수 없으므로 결국 이들은 성령의 은사 대신 거짓 은사를 만들어서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바울은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고 말한 뒤에, ‘데’(de.)보다 더 강한 부정접속사 ‘알라’(avlla.)를 써서 앞의 명령(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보다 더 강한 어조로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악”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소통의 다섯 마디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영적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말하는 일만 마디의 거짓 방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의 방언이야말로 고린도 교회가 버려야 할 “악”이라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방언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인양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거짓말함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자신 모두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지체들을 서로에게 외국인이 되게 만들므로, 결국 교회를 파멸로 내몰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는, 거짓 방언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일에는 장성한 사람처럼 노련하고 능숙했지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일에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고 서툴렀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엄하게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명령하므로 자신들이 자랑하는 거짓 방언이 악임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거짓 방언 대신 예언을 하려고 애쓰는 지혜가 고린도 교회에 풍성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의 현재 상태(거짓 방언을 장성한 사람처럼 능숙하게 하는 악한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21절 이하에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에 대해서는 <16회>에서 상세히 살필 것이다.

--- 각 주 ---

1) 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5.

2) 바울이 방언을 말했을 때 통역도 같이 했는지 안 했는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통역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통역하지 않았다면 바울 자신의 가르침(고전14:12, 27, 28)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본문에서 통역했다는 말이 없으므로 통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외국인에게만 방언을 말했다면 통역하지 않았을 것이며, 예배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한 외국인에게 방언으로 말했다면 현지인들을 위해 통역도 했을 것이다. 물론 바울에게 통역의 은사가 있었다면 직접 통역했을 것이며, 없었다면 다른 통역의 은사자가 통역했을 것이다.

3) 김우현 PD는 18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으로 말하면 바울에게는 그만큼 방언이 중요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바울이다. 그런 그가 방언을 가장 많이 하는 것을 슬쩍 자랑하는 이유와 태도는 무엇인가? 나는 말씀을 나누면서 바울 사도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누구보다 방언의 가치와 유익을 깊이 체험한 사람으로서 그 말로 방언하기를 더욱 권고했던 것이다.”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88. 그런데 김우현 PD는 바울이 방언을 슬쩍 자랑했다고 말함으로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4) 로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p.136-137;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서울: CI KOREA, 2022), p.49;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5 등 모든 방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5) 방언 중지론자인 정이철 목사는 본문의 방언은 바울이 이미 습득한 다양한 외국어였다고 말한다.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48. 물론 바울은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정 목사의 추측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말하다가 뜬금없이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말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6)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10.

7) 방옹자들은 여기서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방언은 개인용 방언이 아니라 통역되지 않은 교회용 방언이라고 말한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5. 만약 방옹자들의 말대로 본문의 방언이 통역되지 않은 교회용 방언이라면 바울이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그렇게 비하할 수 있었을까? 통역하면 되는데 말이다. 만약 이 방언이 통역하지 않은 교회용 방언이었다면 바울은 인간의 말과 비교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비하하는 대신에 통역을 권면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방옹자들이 개인용 방언이라고 말하는 거짓 방언이 틀림없다.

8) 14절부터 19절까지를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14-17절에서는, 너희들이 하는 방언은 공동체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방언이다. 18절에서는, 그러나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남에게 덕을 끼치는 방언을 많이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19절에서는, 나는 너희들이 하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느니 차라리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 말을 하겠다.

9) 레온 모리스. 고린도전서, 정일오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244.

10)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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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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