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심각한 오역과 오석 유감!(2)
본문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을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로 오해한 결정적인 이유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바탕으로 예수님은 10-12절까지에서 두 가지 질문으로 제자들에게 도전을 주시고, 친절하게도 13절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은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라”가 아니라, 13절에 제시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가 명백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누가는 14절(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에서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이 비유의 결론을 비웃었다고 첨언한다. 만약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이 나쁜 짓을 한 불의한 재물로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것이었다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이 비유를 환영했을 것이다.
이렇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사람들은 이 비유의 교훈을 “(불의한 짓을 해서라도)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일차적으로는 6-7절에 언급된 당시의 삶의 정황을 놓치므로, 불의한 재물의 의미를 범죄의 결과물로 오해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는 아래 9절의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를 “영주할 처소”로 오역함으로써,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를 “영원한 천국”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위 본문에서 “영주할 처소”로 번역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그 동안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에 본문 9절은 자연스럽게, 나쁜 짓을 해서 얻은 불의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초점은 불의한 재물을 마련하는 나쁜 짓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데 있다는 억지 설명을 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먼저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명령이 선하신 예수님의 성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완벽한 이야기꾼이시므로, 만약 예수님이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교훈을 주시려고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불의한 짓을 해서라도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스토리로 비유를 꾸미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당한 행위를 소재로도 얼마든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교훈을 주는 비유를 완벽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이해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인간의 행위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재물로 도움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을 도와준 자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영접할 수 있다는 논리도 성립된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그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어떤 자들은 9절에서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는 “그들이” 다름 아닌 “천사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후문맥을 보면, 여기서 “그들이”는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천사들이 아니라. 불의한 재물로 도움을 받은 자들, 즉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9절의 “영주할 처소”(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다.
“영주할 처소”로 오역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 단어 속에 있다. 이는 “처소”로 번역된 “σκηνάς”(스케나스)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이다. “σκηνάς”(스케나스)는 “장막, 천막, 집” 등의 의미를 가진 “σκηνή”(스케네)의 복수이다. 따라서 개역개정에서 “영주할 처소로”로 번역된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에이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를 원문대로 바르게 직역하면 “끊임없이(without end, endless) 그 처소들 안으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처소들” 앞에 정관사 “τὰς”(타스)가 있는 까닭은 앞에 언급된 “그들이” 살고 있는 “그”(τὰς/타스) “처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천국”(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하나님의 나라(왕국)”(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바실레이아 투 데우), “하나님의 집”(οἶκος θεοῦ/오이코스 데우), “하나님의 장막”(σκήνωμα θεοῦ/스케노마 데우), “하나님의 처소”(σκηνή θεοῦ/스케네 데우)등,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는 단어들은 “βασιλεία”(바실레이아), “οἶκος”(오이코스), “σκήνωμα”(스케노마), “σκηνή”(스케네) 등, 예외 없이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영원한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주할 처소”로 번역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에서 “처소”에 해당하는 “σκηνάς”(스케나스)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에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할 수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천국”은 복수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주할 처소로”로 번역된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에이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9절의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나오는 4절(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의 “사람들이(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에 대응하는 말이다. 4절의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δέξωνταί με εἰς τοὺς οἴκους αὐτῶν”(덱손타이 메 에이스 투스 오이쿠스 아우톤)이며, 이에 대응하는 9절의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δέξωνται ὑμᾶς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덱손타스 휘마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이다. 이 두 문장에서 서로 다른 것은 인칭대명사 “나를”(με/메)과 “너희들”(ὑμᾶς/휘마스), 그리고 “집”(οἴκους/오이쿠스)과 “처소들”(σκηνάς/스케나스)이며(“οἴκους”와 “σκηνάς”는 동일한 의미이다), 9절의 문장에는 4절에 없는 “αἰωνίους”(아이오니우스)가 더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문장의 차이는 비유 속의 대상과 실제의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 외에는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로 번역된 “δέξωνται ὑμᾶς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덱손타스 휘마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을 제대로 번역하면 “그들이 너희를 끊임없이 (자신들의) 그 처소들로 영접하리라”가 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내가 주인이 원금 속에 숨겨 놓은 불의한 재물로 채무자들을 도와주면, 내가 실업자가 되는 위기의 때에 그들이 자기 집으로 나를 영접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비유에서는 그 이후의 스토리가 없지만, 만약 있다면 아마도 불의한 청지기의 생각대로, 청지기의 도움 받은 채무자들이 실업자가 된 불의한 청지기를 성심성의를 다해 자기들의 처소들로 끊임없이 영접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스토리를 배경으로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신 교훈이 바로 9절(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이다. 여기서 일차적인 교훈이라 함은 10-13절의 본 교훈 전에 부차적으로, 즉 지나가는 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교훈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9절의 예수님의 일차적인 교훈은 ‘비유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원금 속에 숨겨놓은 불의한 재물로 채무자들을 도와줌으로써, 불의한 청지기가 실업자가 되었을 때, 도움 받은 채무자들이 불의한 청지기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것처럼, 너희도 불의한 청지기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너희들이 재물이 없어질, 즉 굶주릴 위기에 처할 때, 그들은 끊임없이(언제든지 마다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소들로 너희들을 영접하는 유익이 너희들에게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세상의 삶에서도 상당한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마5:24-26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4-26)
예수님은 본문 24절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한 일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형제와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므로,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나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해의 중요성을 25-26절의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사로 설명하신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도 함께 길을 가는 자와의 원한 관계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방치하면, 그 사람에게 고소를 당해 자칫 감옥에 들어갈 수 있다. 이때 상대방에게 빚진 모든 것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으므로, 상대방에게 고소를 당하기 전에 미리 모든 것을 다 갚고 상대방과 화해하는 것이 자칫 감옥에 갈 수 있는 미래의 위험한 일을 피하는 지혜로운 대처이다.
이렇게 세상사에서도 이웃과 화해하지 않고 살면, 자칫 상대방의 고소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서 죽을 고생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예물을 가지고 갈 때,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간다면, 이 얼마나 헛되고 위험한 일이 될 것인가?’가 24-26절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25-26절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25절의 재판관은 하나님이고, 송사하는 자는 마귀이며, 관예는 천사이고, 옥은 지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오해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는 빚진 것을 다 갚으면 옥에서 나올 수 있지만, 지옥은 한 번 가면 결코 다시 나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25-26절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예를 들어서 형제와의 화목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지나가는 길에 일차적으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결과되는 세상에서의 유익을 말씀하시고 난 뒤에, 10-13절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궁극적인 교훈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큰 것, 그리고 참된 것을 너희 것으로 맡기실 것이다”를 말씀하신 것이다.
글을 마치며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비유가 “탕자의 비유”의 속편임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탕자의 비유에 이어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오기 전에 누가는 눅16: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에서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의 표현으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탕자의 비유”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잘 섬기는 것처럼 꾸몄으나, 사실상 그의 주인은 염소새끼도 대변되는 재물이었다. 마찬가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청지기의 주인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채무 장부를 꾸몄으나, 실상은 불의한 이자를 원금 속에 숨겨놓았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처럼 보였을지라도 사실상 그의 주인은 원금에 숨겨놓은 불의한 이자로 대변되는 재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다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처럼 위선을 떨었다. 반면에 탕자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능한 자신의 상속분을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요구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자신의 주인이 재물임을 드러냈으나, 위기가 찾아오자 아버지께 돌아와서 아버지가 자신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한다. 마찬가지로 불의한 청지기는 처음에는 악한 주인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채무 증서를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교묘하게 꾸미는 짓을 하며, 재물을 주인으로 섬겼으나, 위기가 왔을 때에, 원금 속에 숨겨 놓은 불의한 이자를 하나님의 율법에 맞게 채무자에게 돌려줌으로써, 다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 이것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내용이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이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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